요즘 한반도는 모처럼 평화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분단된 한반도에 있어서 평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이 ‘팍스’이든, ‘샬롬’이든 상관치 않다. 국민 모두가 평화를 노래하며, 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갈망한다. 지난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적대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평화의 갈증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국민 모두는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오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반도 평화와 한민족 화해의 증인으로 위탁했다. 특히 관념에 사로잡혀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온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평화의 사도로서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평화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세계평화가 한국교회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는 남한만의 일이 아니며, 북한만의 일도 아니다. 남북한 민족의 일이며, 한민족 모두가 갈망해 왔다. 김지하 시인은 “하늘을 혼자 가질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도, 남한사람만 가는 곳이 아니다. 남북한 민족이 함께 가야 한다. 선교도 남북한민족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남북한 민족을 포함한 20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모두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는 피안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외면하는 것은, 신탁을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선교초기부터 교파주의에 사로잡혀 분열과 갈등을 일삼아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개신교의 티를 보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샬롬’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에 길들여진 나머지, 계층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남북한 민족 간의 갈등 등을 부추기며, 한반도의 평화를 몰각해 왔다.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 역사의 현장을 외면하는 한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한국교회를 향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하라”고 촉구한다. 또한 “교회 내, 교단 간 다툼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위탁한(신탁) 평화와 화해를 노래하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의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독일 교회는 동서로 갈라져 있었지만 교회만큼은 하나였다. 서독교회는 동독교회와 교류하면서, 동독의 양심수들을 정신적,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한마디로 독일통일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를 지원하고, 500만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침묵했던 잘못을 회개했다. 그리고 사람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는 헌법 개정에 앞장섰다.

이제 한반도의 문제는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의 문제는 세계의 문제이다. 세계가 북미정상회담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분단 73년, 한국전쟁 68년을 지내오는 동안 우리의 문제를 한반도에서 고민하며, 한민족 스스로 함께 풀어보려는 대화를 갖지 못했다. 한반도의 분단과 평화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에게 맡겨져 있었다. 분단도 이들에 의해서 이미 예비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공예배에서 감상적이며, 추상적인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를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마디로 행동하지 않는 기도, 허공을 치는 기도였다. 세계분단의 중심에 세계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동서의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데 세계교회가 큰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도 남북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이기 이전에, 신탁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