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어제 교계의 존경받은 한 어른을 만나 그 분에게 속 깊은 하소연으로 필자의 마음을 풀었다. 그냥 그대로 들어주신 그 분에게는 고맙고, 돌아오는 길에서 공연한 하소연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선배님들이 일구어 놓으신 한국 교회의 유산, 우리 세대까지는 잘 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려 줄 것이 빈껍데기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요?” 말없이 듣고 있던 그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도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탄식하셨다.

지금 사회는 급변하고 있고, 국제 정세 특히 동아시아 정세는 가히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향후 한국교회 선교지형을 결정지을 중차대한 일들인데 여기에 대응하는 한국교회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고요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들리느니 교단 내분이요 신학대학의 분쟁이고 특정 목회자의 불미스러운 일들뿐이니 답답하고 막막하다. 그 사이 기독교 교세는 급격히 쇄락하고, 젊은이들은 물론이요 의식있는 중년들까지 마음으로부터 교회를 떠날 적절한 이유를 찾고, 그것이 마련되면 그들의 몸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감지하니 초조할 뿐이다.

주일이면 신앙적이고 모범적인 청년들이 월요일부터 세상 청년들과 전혀 다름이 없고, 친구들에게는 크리스천임을 밝히지 않고, 이력서 종교란에 기독교라 쓰기를 주저한다. 그들은 모태 혹은 우연한 기회에 신앙을 가진 후 나름대로 착실하게 신앙생활은 하지만, 일부 그릇된 목회자들의 일탈과 반윤리적인 교회들의 행태 때문에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매도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히면 “너 아직도 교회 다니냐? 네 목사님도 그러냐?”라는 빈정거림을 당하기가 일쑤다. 차라리 크리스천임을 숨기고 좋은 친구로 지내려고 그들과 같은 문화와 생활을 즐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들의 용기 없음을 탓하기 전에 당당히 크리스천임을 밝힐 수 없게 만든 목회자들과 교회의 치열한 자기반성부터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살 길은 혁신적 자기반성과 과감한 포기에 있다. 포기해야 할 항목들이야 수없이 많지만 핵심은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 책임있는 목회자들의 자기희생이다. 지금 무너진 보수정당의 끝없는 추락 이유가 지금까지 보수를 주도해 오면서 실패를 반복한 이들이 여전히 지역 등의 특정한 이유로 살아남아 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감하게 포기하지 않은 한 한국 보수정당의 미래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집권 민주당은 향후 권력 최소 50년 이상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가혹할 만큼 내부정리를 하고 있고, 꽤 괜찮은 사람들조차도 가차없이 내쳐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성공하고 명망있는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에는 작은 허물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충무공의 결기가 조선을 살렸다는 역사 앞에서, 적어도 후배들에게 물려줄 씨앗은 남겨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모두가 산다. 수많은 교회들이 은행 빚에 허덕이는데 이제 금리는 오르고 있다. 이자부담으로 숨 막힐 교회를 생각하면 필자의 턱까지 숨이 차오른다. 그러나 너무도 빠른 속도로 성도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그리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숨막힘은 고통으로 변한다.

필자는 교회와 목회자의 허물을 세상에 고발하는 초라함을 용서하지 못한다. 만일 세상이 어느 교회와 목회자의 허물을 공격하면 필자는 모든 것을 던져서 그를 지킬 것이다. 아무리 허물이 많다해도 그것이 개인적인 민형사상의 범죄가 아닌 한, 교회와 동역자는 함께 싸워주어야 한다. 감히 세상이 교회를 바로 잡겠다는 오만함, 세상이 교회를 염려한다는 불경함,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교회 전체를 폄훼하는 도전에는 순교적인 각오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내부에서 우리 스스로는 가혹할 정도의 비판과 치열한 논쟁이 용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판과 논쟁에 책임있는 이들은 초라한 논리개발로 대응하지 말고 후진을 믿고 과감히 물러서야 한다. 그것이 그 분들이 후진의 ‘님’으로 남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리스도대학교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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