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처음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때, 수명을 다한 조선조 500년은 중병을 앓고 있었다. 한국은 중국대륙의 세력을 유일한 국제관계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한국인은 세계에 대해 무지했다. 갑자기 휘몰아친 제국주의 세력들의 각축전이 한반도에서 벌어졌을 때, 조선조는 그것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몰려든 강도들의 틈바구니에서 나약한 어린아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당 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백성들은 될 때로 되라는 식이었다.

신흥세력인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미국, 영국 등과의 식민지 분배협상에서 우리 땅을 독점했다. 이 때 그리스도교가 민족의 희망으로 등장했다. 외세의 민족적 울분과 썩은 봉건 지배층에 대한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가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은 새속식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의 주체가 되었던 농민들, 사•농•공•상의 유교봉건사회체제에서 수탈당해 거덜난 천민, 여인, 백정, 갖바치, 마부 등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던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던 사람들이 앞장서서 교회로 몰려들었다.
저들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막다른 골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리스도교를 쉽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다. 이것은 이들의 염원이었으며, 피압박민족에게 희망이었다. 서울승동교회의 창시자인 박성춘은 백정이었으며, 그의 아들인 박서양은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였다. 이것은 처음 그리스도 선교의 주체가 천민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전도의 효과를 노려 부녀자와 하부계층을 일차적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성경도 한글로 번역하고, 찬송가도 우리말로 엮었다. 당시 한글은 ‘언문’이라고 해서 천대를 받았다.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했다. 그리스도교가 한글의 종교로 등장함으로써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과 한글로써 자기정체성를 찾고, 연대의식을 갖고 한국민이 된다는 것은 동시적이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가난한 사람, 천민들이, 한글을 깨치려는 열정으로 이어져서 그것은 곧바로 저들의 민권운동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들이 바로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한민족의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글은 한민족 전체의 글이 되었다. ‘독립신문’을 한글로 펴낸 것도, 한글성서의 보급으로 인해 눈을 뜬 천민층이 매우 두터워졌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주고도 남는다. 이는 곧 삶과 표현이 하나 되는 큰 혁신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천대받던 사람들이 주체가 된 민권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전래로 이 땅의 수많은 소경들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이 땅의 천민들의 갈망과 지혜에서 얻어진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선교사들이 뿌린 씨가 천민들에게서 뜻밖의 다른 열매가 맺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총이며, 역사였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중 다수세력은 장로교였다. 장로교는 민권운동에 또 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몸으로 체험하고, 시행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장로회는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장로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체제이다.

모든 일은 회의를 거쳐서 결정되었다. 애당초 교회에는 하부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평등신앙공동체 일 수밖에 없었다. 귀천의식과 상관없이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계층들이 자신의 뜻을 펴고, 선거라는 구체적인 권리행사를 하며, 지도자로 피선되는 경험과 토론으로 말이 통하는 현실을 경험했다. 이는 곧 민족적,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울분에 점화될 수 밖에 없었다. 민권과 자주국, 이것은 둘이면서 하나의 염원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정착되었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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