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자 목사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셨다.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은 간질하는 소년으로 인하여 전전긍긍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의 아버지는 병든 아이를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를 못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자 아이의 아비는, “아이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줄 것”을 간청했다.
예수는 귀신을 꾸짖어 그 아이에게서 떠나게 하셨다. 아이는 멀쩡하게 되었다. 이 기적을 본 제자들은 “선생님은 그리도 쉽게 귀신을 쫓아내는데 왜 우리는 쫓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대답하셨다. 한마디로 기도의 능력을 말 한 것이다.

기도는 히브리어로 ‘데필라’, ‘팔랄’이라고 한다. ‘데필라’는 서원한다는 뜻이지만, ‘팔라’는 중재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신학자 중에는 기도를 ‘성도의 호흡’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유일한 창구라고 했다. 때문에 성도들은 기도를 하나님과 교제로 생각하고, 자신에게 부딪힌 어려움과 소원을 간구하며,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

사람은 나약한 존재이다. 삶의 현장에서 어려운 일과 즐거운 일들을 경험한다.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영생을 원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고, 행복을 원하면서 괴로워 할 수밖에 없고, 깨끗한 삶을 원하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또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면서 우연의 힘에 농락당하고, 자유를 원하면서 운명에 희망을 당한다.

한계 상황에 부딪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시 39:12)”이라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현대교인들은 믿음이 좋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할 줄을 모른다. 그리고 방황한다. 어떤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적지에서 훈련되지 않은 군인과도 같다. 한마디로 기도도 훈련이 필요하다.

타고르의 단편소설 ‘환상’의 여주인공은 착하고 아름다운 신부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믿는 교인이었다. 신부는 눈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풋내기 의학도인 남편의 옹고집은 신부의 눈을 멀게 했다. 그리고 평생을 신부의 손발노릇을 하며 살겠다고 위로했다. 그러나 신부는 자신과의 약속이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위로받기 보다는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면, 진노를 받기 때문이다. 남편은 일순간의 잘못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기도하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내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기도의 능력은 기족을 만들어내고, 아내의 기도는 죄인인 남편을 회개시키고, 더러운 손을 선행하는 손으로 바꾸어 놓는다.

햇빛중앙교회 담임·충주금식기도원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