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경 욱 목사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야훼신은 고정화된 군주체제를 거부하고, 살맛나는 새로운 나라의 활력소가 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군주국으로 강제된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해방되어 오랫동안 평등사회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군주에 대한 저항정신과 신앙심은 십계명에 그대로 배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조의 요약은 야훼신 외는 어떤 신도 섬길 수 없으며, 어떤 우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변질된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군주제가 수립된 다윗 때부터이다. 다윗왕은 이웃국가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는 계속적인 정복전쟁과 함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고대 히브리의 야훼신앙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하여 성전을 세울 근거를 마련했다.

한마디로 야훼신이 다윗에게 납치된 것이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자신이 세운 성전은 야훼신을 감금하는 감옥이 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이로부터 예루살렘은 권력과 종교가 야합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현장이 되었다. 한마디로 야훼신은 착취의 신이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본디의 신과는 다른 것이었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이스라엘계의 사람을 숙청해 버렸다.

오늘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곳에 하나님을 가둔 한국교회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 사실 한국교회의 하나님은 성전 하나님, 성전 예수님이 되어 버렸다.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점은 정치적인 동기와 직결되어 있는 갈릴리이었다. 그곳은 ‘이방인의 땅’, ‘선한 사람이 날 수 없다’고 낙인찍힌 소외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시고,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 그것은 현실적인 혁명의 선포였다.

예수님이 찾아간 대상은 갈릴리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거덜난 사람들이었고, 창녀, 세리, 문둥병자, 떠돌이 등이었다. 철저하게 이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것이다. 기성종교의 심판에서 이들을 변호하며, 이들을 옭아매는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했다. 갈릴리는 로마의 앞잡이에게 빌어 붙어 자기 민족의 고혈을 짜아내는 의미에서 전형적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예수님은 그곳에 새로운 공동체의 씨를 뿌리고, 관념과 집단의식이 팽패한 예루살렘의 구조악과 싸우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로마와 예루살렘파의 야합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죄목은 ‘유대의 왕’으로 지목되었다. 예수님이 자신의 활동무대를 갈릴리로 한 것은 ‘히브리’와 계보를 같이하는 오클로스와 더불어 살다가 다윗성에서 이들을 해방시키고, 새로운나라(신천지)를 이룩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예수님은 군주적 권력과 폭력에 의한 오클로스의 지배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것은 마가복음 10장 42절과 45절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이 교훈은 새로운 세계는 종이 주인이 되는 사회여야 한다는 혁명적인 발언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신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유대체제의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안식일법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사회법도 마찬가지이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악을 정당화 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판처럼 만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한국교회는 즉각 추방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는 체질이 되고 말았다.

예장 대신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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