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목사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 이름이 계시된 본문으로 유명하다. 또한 모세의 소명도 함께 다뤄야할 주제이나 본문에 쓰인 하나님 이름이 두 가지라는 점에 주목한다. 모세는 스네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야웨를 만나 이스라엘을 건져내라는 명령을 듣지만 바로에게 가라는 파송은 엘로힘에게 듣는다. 즉 야웨는 구원하시는 분이며 엘로힘은 정의를 구현하시는 분으로 구분된다는 뜻이다. 단순히 문학적 서술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차이를 둔 것인가?

유대교 랍비들은 사뭇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곧 야웨는 자비로운 분이시고, 엘로힘은 정의로운 분이다. 창세기 1장에서 우주를 지으실 때 엘로힘이 창조주로 묘사된 이유가 설명된다. 우주의 질서와 법칙은 엄격하고 치밀하다. 각 자의 위치와 궤도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엄청난 혼란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주 창조에는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정의가 하나님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를 묘사하는 창세기 2장에는 야웨가 등장한다. 야웨는 너그러운 하나님의 속성이다. 사람에게 엄격한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면 노아와 다니엘과 욥 외에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겔 14:14,20). 즉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평가한다면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자비로우신 야웨가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일찍이 랍비들은 하나님의 두 성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만약 내가 오직 은혜로 세상을 창조한다면 이 세상에는 죄로 가득할 것이고, 또한 정의로만 창조한다면 심판에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의와 은혜의 기초 위에 이 세상을 창조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유지될 것이다.<Genesis Rabbah XII.15>

그런가 하면 비평적 연구자들은 야웨와 엘로힘이 다른 전승에 비롯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른 바 자료설은 시대와 신학적 배경이 다른 두 저자 곧 J 기자와 E 기자를 상정한다. 전자는 다윗 솔로몬의 전통에서 비롯되었고 후자는 8세기 북 왕국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두 신명에 대한 자료설의 분석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지만 그 이론으로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출애굽기 3장에는 야웨와 엘로힘이 섞여쓰이고 있다. 출애굽기 3장은 1-8절, 16-22절에는 야웨는 구원을 베푸시고, 9-15절에는 엘로힘이 파송하는 분으로 역할이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야웨는 이스라엘을 건져내어(하칠;: 8절) 가나안으로 올라가게(알라: 17절) 하는 구원의 하나님이라면, 엘로힘은 히브리(노예) 해방을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10,13-15절)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님이시다. 4절에는 야웨와 엘로힘이 함께 언급되어 조상들의 하나님 엘로힘과 모세가 처음 대면하는 야웨가 동일한 분임을 암시한다.

탈무드는 야웨 엘로힘을 이렇게 풀이한다. “야웨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가리키고 엘로힘은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의미한다”(Sanhedrin 38b). 자비를 강조하면 정의가 설 자리가 없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위 본문에서 하나님의 두 성품에 관한 탈무드와 랍비들의 견해를 확인한 셈이다. 그럼에도 야웨 엘로힘이 동시에 지칭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창세기와 역대기에 30여 차례 집중된다(출 9:30). 그러니 야웨와 엘로힘은 서로 보완적인 속성이다. 마치 엄부자모(嚴父慈母), 곧 아버지는 엄격하게 어머니는 자애롭게 자녀를 훈육하듯 야웨 엘로힘은 더러는 차디찬 정의의 잣대로, 또 더러는 잘못을 너그럽게 감싸 안는 자비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 스네 가운데 나타나신 분은 야웨지만 모세를 부르신 분은 엘로힘이다. 이로써 모세의 사명은 분명해진다. 곧 야웨의 자비와 사랑에 힘입어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해야하고, 엘로힘의 정의와 심판에 의지하여 바로 앞에 나가서 “내 백성을 가게 하라”(10절)고 당당하게 요구해야한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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