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 붉은 얼굴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이영춘 시인은 개인적인 체험 즉 가족사를 바탕으로 이 시를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상상력의 발휘로 촉발된 게 아니라 자신의 절실한 경험을 재구성하여 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한 시이다. 시적 전개가 딸인 시적 화자가 오래 전 결혼해서 어려운 신접살이를 하고 있었던 시기에서 시작된다. ‘아침 해’가 떠 오르는 즈음 출근하려고 나가는 골목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돈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어렵사리 뱉어낸 목소리였다. 그런데 ‘철부지 초년 생’인 딸은 ‘싹뚝 무 토막 자르듯’ 단호하게 아버지의 뜻을 거절했다. 그리고는 세월의 수레바퀴가 한없이 돌아갔다.
이제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당시 심경을 헤아릴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그때는 도무지 미루어 짐작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역지사지의 처지가 되어 돌이켜 보니 후회가 너무 깊다. 그 상처가 오래토록 ‘가슴 속 붉은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어 ‘아버지의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우체부가 시인 네루다에게 시가 무엇인지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 노시인 네루다는 한 마디로 시는 은유라고 했다. 그만큼 시에서 은유는 중요한 미학적 장치이다. 이 시는 ‘해, 저 붉은 얼굴’이라는 제목의 탁월한 은유가 자칫 긴장미를 잃을 수 있는 체험시의 품과 격을 높이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해는 시간 질서의 중심축이기도 하지만 대개 아버지를 상징한다. 이 시에서 ‘해’는 시인이 그 심장에 ‘천 근 쇠못’을 박은 아버지를 가리킨다.
꾸밈이 없는 경험에서 빚어낸 시어의 무늬결, 소박하고 솔직한 시어의 신중한 배치, 진정성 있는 체험의 현재화로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시어의 온도가 참 따뜻하다. 그래서 상처에 공감하게 하고 영혼을 위무해 준다. 좋은 시는 독자와 소통하게 하는 힘이 있다. 시로 인해 아름다운 정서의 파문이 인다. 시간을 내어 아버지 산소에 꽃 한송이 올려야겠다.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