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죽음의 땅에서 피신한 수많은 난민들이 세계 곳곳을 방황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예멘을 비롯한 시리아 등 중동지역 국가의 많은 국민들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내전을 피해 사랑하는 조국과 고향, 그리고 부모형제를 그대로 두고 떠돌이가 됐다. 이들의 생명은 위태롭다. 많은 사람이 지중해를 건너다가 죽임을 당했고, 거기에는 어린아이들도 끼어 있다.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디(3살)의 주검은 세계인의 공분을 샀다.

당시의 쿠르디의 안타까운 죽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쿠르디는 5살된 형과 엄마도 운명을 같이했다.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났던 피조물들의 죽음은 한마디로 참담하다. 당시 세계의 언론들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쿠르디에게 집중했다. 누가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있는 세계는 이들의 위태로운 생명을 구원해 주지를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을 몰아내고 있다. 한국에 온 예멘 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을 이 땅에서 몰아낸다면,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예수님은 “나그네를 영접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나라 없이 유리방황하는 떠돌이와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는 하비루들과 함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의해서 역사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우리 땅에 온 나그네들을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가 나그네 되었을 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것이다.

중동을 떠난 난민들은 거친 풍랑을 헤치고, 이웃나라에 도착해 나그네 신세가 됐다. 거친 풍랑 앞에 설 때 난민들은, 불안해하면서도,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대한민국 제주도에 온 이들 역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일부 국민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일본식민지 아래서, 망해가는 이씨조선을 피해 만주 등서 방황하며, 세계에 도움을 요청했던 당시를 잊고,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들은 대한민국에 희망을 걸고 찾아온 나그네, 떠돌이들이다. 또한 이들 역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할 피조물이다. 이들은 한국에 정착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언제인가 자신의 조국이 안정되면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이 임시 피난처가 되어달라고 호소한다. 그런데 나그네의 아우성 소리는 그 누구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남의 일처럼 외면하고, 배척한다. 이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가 예멘 난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인터넷상에서 이들을 “내치느냐?” 아니면 “받아들여야 하느냐?”를 놓고, 찬반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이웃의 도움을 요청했던 과거를 잊고 있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이웃나라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구원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섬김이다.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 이들을 난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돈의 많고, 적고의 문제는 아니다. 난민인정 신청을 한 예멘 인들은 말레시아를 거쳐 어렵게 제주도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믿고 찾아온 나그네이다. 이들은 제주도를 벗어날 수도 없다. 그것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지역이 제주도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졌으니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어떤 국적이든, 성별과 인종,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 한 생명으로 고귀한 존재임을 서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만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 그래야만 그리운 조국을 떠나 나그네가 된 예멘 난민들도 새로운 세상, 아니 새로운 나라를 향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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