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바알의 물신숭배가 노예화하고, 몰록 신들이 도처에서 인간의 생명, 특히 어린 생명들을 제물로 요구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질서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성서로 돌아가야 하며, 보잘 것 없는 이웃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고, 그들을 만나 구해준다. 이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고 한다”(출애굽기 3장7-8절)

구약성서의 계약법전을 비롯한 신명기법전, 성법전에 나타난 사회법의 핵심은 하나같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주된 관심으로 삼고 있다. 율법의 사회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주전 8세기 아모스를 비롯한 이사야, 예레미아, 느예미아, 사무엘 등의 예언자들 역시 이러한 율법의 사회법 전통을 계승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돌보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았다.

예수님도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 1장 15절)는 선포로 공생애를 시작했다.

예수님은 베들레햄 마구간에서 태어나 거친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하늘에서는 영광이며, 땅에서는 평화였다. 천사들은 노래하여 이 소식을 목동들에게 전했다.

바울은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했다”(빌립보서 2장7-8절)고 그리스도 찬가에서 선언했다.

예수님은 마침내 이 세상 지배자인 헤롯에게 박해를 당하고 로마제국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예수님은 과부와 어린이, 떠돌이, 세리, 창녀, 장애인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있었으며, 이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무조건 따라 다녔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였다. 따라서 예수님이 성육신한 장소인 교회의 시간과 장소도, 고난당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시작과 종착점이 어디인지 극명해진다. 기독교 헬레니즘문화를 시도했던 초대교회의 신앙, 중세 봉건사회체제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계급을 위한 로마카톨릭 신앙,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서구의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계급들의 경제적 사회적 토대를 위한 경건주의, 근본주의, 자유주의 신앙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신앙공동체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이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우리는 맘몬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전쟁과 갈등으로 고통당하고,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무질서하게 파괴되어 가는 자연을 살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이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며, 신앙공동체에 참여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맘몬 숭배의 세계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평화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