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탁 기 목사

7월은 법의 달이다. 요즘 힘없고, 빽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아우성 소리가 오늘 이 땅에 아우성 친다. 성서의 법정신은 법을 지킬 수 없는 바라오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던 히브리인과 떠돌이 등 미련하고, 가련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나라운동으로 시작된다. 성서의 법정신은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 법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맞서 싸우지 않았던가. 안식일법과 정결법은 분명 이들을 위한 법이었다.

그런데 이 법을 바리사이적인 사람들이 악용했다. 한국선교초기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는 “한국인들은 교회의 생쥐들처럼 가련하고, 개들처럼 게으르고, 돼지들처럼 더럽고, 늑대처럼 탐욕스럽고, 그들은 거의 일하지 않고 쉰다. 그러면서도 이들에게는 칭찬할 것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갈구한다. 그들은 그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함에 있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조선의 백성에게 있어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인가. 아펜젤러를 비롯한 조선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 따라 천박하고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노력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식민지세력에 항거했고,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을 향해 개혁을 요구했으며, 남녀평등의 사상을 구현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가치이며, 오늘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한 한국개신교가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교회 분쟁의 이면에는 돈과 권력(교권), 명예와 쾌락을 쫓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대다수 교회 분쟁이 농어촌교회나 도시의 미자립 교회가 아닌 돈과 권력, 명예를 가진 중대형교회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대형교회 목사가 비자금을 형성, 이 비자금을 관리하던 장로가 죽임을 당했다. 이는 법 이전에 양심과 결부되어 있다. 법보다 더 귀한가치를 가진 것이 바로 양심이며, 도덕이고, 윤리이다.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성추행, 성폭행 사건이 교회 안에서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면서, 애급에서 종살이하면서 처절하게 당했던 자신의 백성, 여성들을 기억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 성서의 법정신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백성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 모습은 이제 염증이 느껴진다. 교회 내에서 이제 가난하고, 힘없고, 빽 없고, 천박한 사회적 약자들이 설자리는 없다. 그것은 교회가 성서의 법정신을 상실하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교회내의 다툼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성서의 법정신에서 크게 이탈했다. 그래서 성서로 돌아가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면면을 사펴보면 시골의 노인 몇 명이 출석하는 조그만 교회나, 혹은 교인들이 몇 안 되는 도시의 미자립교회가 분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도시의 대형교회들 중에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교회가 적지 않다. 대규모의 부동산 등 수많은 재산을 두고 분쟁이 야기되는 사례, 교회 주변이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되면서 땅 값 상승으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교권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담임목사의 자리를 두고 분쟁이 발생한 사례 등등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의문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빼앗아 버렸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 곳에 신을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예수님을 교리화 및 제도화 시켜버렸다. 그런 나머지 오늘 한국교회는 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교회 문을 활짝 열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회협 증경회장•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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