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루터는 세속 정권에게는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세속적 사명을 제한적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속 권세를 가진 자들은 교회에게 특권이 주어져 있는 신앙적인 문제를 강압적으로 시도해서는 안된다. 시민 정권의 통치는 복음에 의한 영적인 영역,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루터는 아담의 자녀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한 그룹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고, 다른 그룹은 세상의 왕국에 속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왕이자 주님으로 믿는 자들이다. 참된 기독교인들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가르치고 있으며 생명을 주기 때문에 통치자나 왕이나 칼이나 율법이 필요가 없다. 세상의 칼과 법은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는 별로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루터는 확신했다.

그러나 세속 정부가 임시적인 땅 위에 일을 담당하고 있다. 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권세가 세워지게 되었다. 세속 정부는 사탄에 맞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살인, 무질서와 파괴를 방지하는 일을 해야 한다.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세속정권을 지배해서, 성경인쇄를 금지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루터의 개념은 중세시대 수천 년 동안 세속 권세와 교회가 함께 구성한 기독교 공동체라는 상황 하에서만 가능한 이론이었다. 기독교 왕국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게 된다. 중세시대는 교회와 국가와의 사이가 긴밀하게 연계성을 갖고 있었다. 교회가 국가를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더구나 루터는 삭소니의 선제후 프레데릭 3세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이 땅 위에서 권력의 두 기둥이 되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관계와 역할을 정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을 비롯하여 서구유럽 전 지역에서, 군주의 종교가 그의 통치 하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종교가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되면서, 루터의 이론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고 말았다. 세속 군주들이 교회의 일에 깊숙이 개입하였던 것이다. 개혁파 교회들은 정치문제에 대해서 무작정 침묵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루터파 교회들과 영국 성공회는 국가의 지배자가 교회의 상당한 영역에까지 통치하는 형태를 따라가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을 제정하였다. 신대륙 미국에서는 국가와 교회 사이에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헌법에 명시하였다.

하지만, 개인이나 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끼치려 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서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국가는 학교에서 종교와 관련된 행사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 등 신칼빈주의 신학자들은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기독교 신자들은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람의 모든 활동영역에서, 모든 사상과 생각들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요, 통치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국가가 그 어떤 전도활동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냥 교회는 문을 닫고 있어야 할 것인가?

1521년 5월 4일, 루터는 보름스의회에서 곧바로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했다. 여기에 머물면서 신약성경을 고지대에서 주로 사용하는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는 1522년 3월 농민전쟁의 혼란기를 수습하기 위해서 다시 비텐베르그로 돌아가게 된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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