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주52시간 이상의 노동을 금하고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것은 수입은 같으면서도 일자리는 나누겠다는 정책적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최저임금의 취지는 정당한 보수를 보장하고 사용자의 착취를 방지함이다. 이런 목적이기에 주 52시간 이상 노동 금지와, 최저임금 증액을 탓할 수는 없다. 동시에 이로 인해 어렵다는 사용자의 현실적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 급여체계가 서양처럼 철저한 원가계산에 기초한 것도 아니기에 갑자기 사용자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하라는 법적 조치는 필연적으로 저항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는 단순 논리나 셈법으로의 접근은 곤란하고 상당한 사회적 토의가 필요하다. 노동자와 사용자들의 상호이해가 첨예하게 걸린 문제이며,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양자는 물론이요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복종 운동과 같은 그런 현상들이다. 아는 대로 최저임금의 적용 대상자들이 주로 비정규직 육체노동자들인데 이들의 인건비가 서양에서는 결코 적지 않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집에다 웬만한 장비들은 다 마련해 놓고 스스로 해결한다. 이는 육체노동자의 수입도 크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진 사회의 한 면이다. 우리도 더 발전하면 굳이 최저임금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하튼 주 52시간 노동과 최저임금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즉 주 52시간을 지금의 최저임금으로 받는다면 소위 ‘저녁이 있는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간제 근로자가 한직장에서 52시간 이상을 더 일하지 못하도록 법제화된다면 일자리는 많아질지 몰라도 개인의 소득은 줄어든다. 그러면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노동자는 Two Job을 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유능한 사람이 여러 개의 비정규직을 가짐으로 일자리는 준다. 그럼 어떻게 하면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때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고용과정에서 주52시간 근로와 최저임금 중에 하나는 상호 협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즉 52시간 근무를 보장하고 법정최저임금을 지급하든지, 아니면 52시간을 초과하여 근무하되 급여는 상호 협의가능하도록 하는 유연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고용의 유연성이 항상 사용자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사회라면 근로자에게도 충분히 소득 증진을 유익한 제도가 될 수 있다. 52시간을 초과하는 고용에 대하여 유연성을 보장해 주면 사용주의 부담은 경감되고 시급제 노동자는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만큼 일 할 수 있는 직장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즉 언제든지 시급만 맞으면 원하는 시간만큼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니 시급 노동자들에게 결코 불리한 제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용자는 협상 가능한 임금으로 항상 채용의 문호를 개방해 두고, 근로자는 언제든지 일을 하고 또는 그만둘 수 있다.

과거 필자의 미국 경험을 돌이켜 보면, 오후 3시 30분이면 칼같이 퇴근하고, 바로 다음 사람이 와서 마치 한 사람이 계속 일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을 이어갔다. 책상에는 사물함도 개인 물품도 없다. 여러 사람이 일해도 한사람이 일하는 것처럼 물흐르듯이 업무는 차질이 없었다. 누가 일을 그만두었다고 해서 일 자체가 지체되거나 꼬이는 헤프닝은 없었다. 그리고 그만둔 사람이 직장이 없어 노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가 갈 곳은 많다는 뜻이다.

정부의 주52시간 근무와 최저임금 의지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것을 시행할 수 있는 사회적 노동구조나 의식의 변화없이 제도만을 이식시키려는 시도는 시정되어야 한다. 탁상행정의 티가 나고 프로를 흉내내는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난다. 자칫 입게 될 내상은 치유하기 힘들다. 정부가 고민하지 않는다면 치루어야 할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고, 전 국민적인 저항으로 인해 정권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폭발성과 휘발성이 강한 이슈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대학교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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