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이스라엘의 신앙역사에서 항상 문제가 된 것은 ‘죄’이다. 그러데 죄라는 게 시대 변천에 따라 조금씩 진화한 것을 볼 수 있다. 법이 제정되고, 신앙의 형식이 갖춰지면서 죄도 예사로운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도록 정교하게 진화한 것이다. 예언자 운동은 바로 이와 같이 진화된 죄를 예리하게 간파한 데서 비롯된다. 이사야는 진화된 죄, 지능적으로 발달해서 남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죄, 분명히 죄이면서도 선으로 위장한 죄를 가차 없이 질타한 예언자이다.

제16대 유다왕 요시아시대를 거치면서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층은 어느 순간에 신실한 신앙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우상을 폐기했고, 절기를 지키는 데 열심이었으며, 율법을 엄수하는 데 어긋남이 없었다. 놀라운 변화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변화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 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 29:15). 저들은 백성의 고초를 살피는 척하면서 뒤로는 사익과 권력 쟁취에 혈안이었다. 겉으로는 나라의 자존을 지키는 척했지만, 뒤로는 강대국 이집트와 뒷거래를 했다. 이사야는 그들을 향해 질타한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떠났[다]”(13)고.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안보’를 중핵으로 삼아 통치했다. 소위 권위주의 통치를 한 것이다. 그러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의 희생과 저항으로 민주화 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권위주의 시대의 종복이었던 자들도 자연히 민주화의 옷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닌 이들이 있어 보인다. 무소불위의 권력집단인 국군기무사가 촛불정국에 대응해 작성한 계엄령선포 계획서는 드러난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하다. 문제는 이를 두고 일부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 가운데 ‘국가 안보를 책임진 군으로서 당연한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저들이 정말 ‘계엄령’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그동안 여러 차례의 계엄령이 모두 ‘국가 안보의 위중함’을 빙자해서 선량한 국민을 총검으로 겁박하고 국권을 찬탈한 것이었음을 몰랐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알고 보면 민주화의 옷만 걸쳤을 뿐 속은 여전히 권위주의 체질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독재시대를 그리워하는 자들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터이다. 성경이 ‘변화’를 말하지 않고 ‘회개’를 말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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