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한 지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빼앗기고 도탄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암흑을 몰아내고 생명의 빛을 회복시켜 주셨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 자주, 구국운동에 앞장서며 숱한 순교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역사의 실체적 진실은 아직도 그 민낯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가 일제 치하에서 저지른 과오와 죄악이 8.15 해방과 함께 단절되지 못한 채 여전히 오늘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친일역사는 한마디로 시대 앞에 예언자적 사명을 깡그리 망각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1930년대 초부터 관공립학교는 물론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노회 또는 총회를 통해 앞장서 결의하며 부화뇌동했다.

첫 시작은 1938년 2월 3일 선천읍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였다. 평북노회는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임을 시인”하는 가결로 신앙적 양심과 죄책감마저 내던져버렸다. 이런 분위기는 1938년 9월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제27회 총회로 이어져 장로교가 가장 먼저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된다.

감리교회는 한술 더 떠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감리교회의 수장이었던 양주삼 총리사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총독부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였고, 그해 10월 5일부터 열린 제3회 조선감리회 총회 셋째날인 10월 7일 오후에 배재중학교 운동장에서 ‘애국일’ 행사를 치른 다음 참석자 일동이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성결교회도 구세군도 장로교와 감리교의 뒤를 따랐다.

얼마 전 상영된 영화 ‘암살’과 ‘밀정’에 보면 숱한 애국지사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여의도 면적의 3배인 260만평의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이들 형제가 1911년에 만주 서간도지역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내내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란한 발자취를 남긴 이들 6형제 중 상해임시정부를 지킨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객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우당 이회영은 뤼순감옥에서 고문당하다 옥사했으며,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댄 둘째 이석영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순교는커녕 호의호식하며 조선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제국주의자들과 같은 편에 섰다. 신의주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는 교회조직을 전쟁보조 기구로 개편하고 1937년부터 3년 동안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2000원을 모아 바쳤다. 심지어 일본군인들이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오도록 기원하는 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위문회 181회를 치렀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한 교단과 교회, 목사, 성도들의 죄를 이미 지나간 과거로 묶어 덮고 회피해 왔다. 근래에 들어 예장 통합 등 교단들이 과거의 신사참배를 회개한다는 결의가 있었으나 그 역시 통렬한 회개와 뼈를 깎는 거듭남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회개의 진정성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대 교단들이 그동안 한국교회 앞에, 또 사회와 민족 앞에 비쳐진 모습은 개혁이 아닌 수구에 더 가깝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8.15는 과거 일제로부터의 해방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저질러 왔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범죄의 사슬을 끊지 못하는 한 진정한 해방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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