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예수님이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기슭에 이르셨다. 제자들과 아이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나 예수님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서려 계신다.

누가복음19:41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매우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이 단어의 원래 의미를 살린다면 훨씬 더 강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간장이 끊어지듯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어조를 발견할 수 있다.

환호하는 무리 속에서 우리 주님은 왜 우셨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평화의 길은 칼이 아니라 사랑으로 성취되는 길이다. 평강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의 관계로 들어가는 은혜를 입는다.

'평화의 도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이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제시한 평화이신 예수님을 배척한 사망의 도성이 된다. 결국 평화의 왕을 배척하는 완고함으로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자초하고만 성(城)을 바라보시는 주님은 애통의 눈물 흘리신다.

한 나라가 진정으로 평화를 구가하는 나라가 되려면 국가 지도자로부터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교훈을 중심으로 받아야만 될 일이다.

우리가 추구할 진정한 평화의 길은 십자가의 도를 좇아 회개와 믿음과 사랑으로 되는 길이지만 이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고, 갈수록 더 심화될 세상이기에 우리도 감람산 기슭의 예수님처럼 기도의 눈물은 필연이나 믿음의 사람들마저도 긍휼과 사랑의 눈물이 메말랐다.

“말씀하셨다. 너도 이 날에 평화에 관한 것들을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그것들이 네 눈에 감춰져 있구나.”(눅 19:42. 바른)

“네 눈에 감춰졌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절망적 표현이다. 구제받을 희망마저 없어져 버린 것에 대한 애통의 뜻이 감겨 있다. 또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4)」는 예수님의 탄식은 평화이신 예수를 영접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음에 대한 탄식이다. 결국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해졌다.

평화를 놓이고 당할 심판을 까마득히 모른 채 환호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예루살렘성에 매혹당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기회를 놓쳐버린 절망과 슬픔의 처절한 도성이었다.

기회란 정치나 기업의 경우만이 아니다. 개인이나 어느 공동체나 국가나 간에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는 소중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영적상태는 피폐 그 자체다. 역리적으로 이해하면 이때가 주님을 모시고 본질로 돌아갈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이기도 하다. 가족이나 이웃이 이 기회를 붙잡도록 무릎으로, 눈물로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한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믿는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이며 선지자적 사명인 동시에 제사장적 의무이다.

예수님은 왜 우시는가.

예루살렘에 임할 가공할 만한 멸망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유월절을 맞아 원근각처에서 몰려든 인파로 마치 죽었던 도시가 다시 살아난 듯 성시(成市)를 이루고 있지만, 그들과 그곳에 소리 없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예레미야처럼 정신을 차리고 우는 자가 없었다.

주후 70년, 로마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토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당시 그의 통역관이었던 요세푸스의 기록이 그 심판의 현장을 역사로 남겼다.

성경에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예언된 말씀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의 두 사건을 동일하게 다루신 다른 표현을 빌릴 수가 있다. 마치 멀리서 보면 하나로 겹쳐있는 산봉우리도 가까이서 보면 그 둘 사이에 예상할 수 없는 간격이 있음과 같다.

AD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멸망사건과 2천 여 년이 지나도록 미실현 상태에 있는 세계 종말은 주 안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비록 그 사이에 수천 년이라는 시간의 골짜기가 있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이 액면 그대로 성취되었다면 남아 있는 큰 사건, 즉 세계종말도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다.

이 역사 앞에 직면해 있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눈물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형제를 위해, 이웃을 위해, 나라를 위해, 복음전파를 위해, 눈물 없이 기도드릴 수가 없다.

주의 뜻과 영광을 구하는 눈물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는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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