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고 현 목사

기독교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이를 바탕에 깔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그 곳이 삶의 자리였으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웃을 사랑할 자유를 부여받았다. 사랑이 없다면, 기독교는 아무 가치도 없다. 성경 전체 흐름은 이웃을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라고 교훈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유교에서는 인을 말한다. 그런데 불교는 자신의 수행을 통해, 유교는 정치가들의 도덕과 윤리, 덕목을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성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서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고 있는가. 사랑의 실천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다.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은 한 사람씩 일어서서 글짓기를 발표하고 있었다. 숙제의 제목은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직업이 많아서인지 아이 중 같은 직업을 가진 부모님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각자 부모님의 직업을 재미나게 발표했다. 그런데 다음에 발표할 아이를 보고 선생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 아이는 부모님이 이혼하고 가정 형편도 어려워 오래전부터 보육원에서 생활했다. 선생님은 이 아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원망하며 초조하게 지켜봤다.
"우리 엄마의 직업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빨래도 많이 하고, 청소도 많이 하고, 설거지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바쁘시지만, 우리가 잠들면, 불 끄고, 누우면 '잘 자라, 사랑한다'고 언제나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가 참 좋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은 평범한 발표라고 수근 거렸다. '우리 엄마도 집에서 저렇게 하시는데...', '쟤네 집에는 형제가 많나 봐' 등등 비웃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 아이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 엄마는 보육원의 수녀였다. 선생님은 발표를 마치고 내려온 아이를 사랑스럽게 안아 주었다. 사랑받는 아이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깨닫는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사람에게는 이웃도 없다. 개인적이며, 이기적이다.

사랑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에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한 아이가 하늘나라의 주인공이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 아이는 수녀님으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도 조건없이 이웃을 사람할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돌봐주며, 사랑을 쏟은 수녀님에게 이렇게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아이를 그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새로운 사랑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오드리 헵번의 말대로 “우리가 가진 두 손 중 한 손은 나 자신을 위한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예장 보수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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