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우리는 서방교회(로마 가톨릭교)가 지배하고 있을 때에 개혁교회가 탄생하고 그 영향의 선교를 받은 한국의 개신교 역사를 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이미 우리 선조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으며, 그 진원을 서방그리스도교회도 아니며, 개혁교회도 아닌 동방그리스도교회라고 한다. 그 예로 “신라, 발해 불상에 새겨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교의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 하며, 그리스도교 문화가 불교 미술의 정수인 석굴암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까지를 인용 한다.(출처 : 불국사에서 만나 예수)

그 동방신학(동방 정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막시무어’ 그는 7세기 가장 중요한 정통신학자로 전해지며, 실제로 그는 “비잔틴 신학의 실제적인 아버지”로 불렸으며, 그는 유명한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오시우스’ 저작들에 대한 주석서를 비롯해 다양한 범주의 주제로 90여 권에 달하는 작품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막시무어’는 580년경에 태어났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를 보좌하는 수석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14년경에 세속적인 모든 경력과 지위를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고, 626년에 페르시아가 침입하자 북아프리카로 갔다.

당시 동방 정교회는 단성론 자들과 화해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교리적 방침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시무스’는 이에 반대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고 확신했다. 645년 카르타고에서 ‘막시무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된 교부 ‘파이러스’를 만나 이 주에로 논쟁하기도 하였으며, 이 대 ‘막시무스’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양 의지론”을 다시 확신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서방교회(로마 가톨릭교)가 다시 이 주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649년에 로마로 가서 “두 의지”에 관한 교리를 선포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하고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로인하여 653년에 교황 ‘마르틴’에 의해 추방되었고, ‘막시무스’는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단일 의지 교리”를 수용하라는 압력이 거셌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망명길에 올랐다가, 661년에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더욱 강도 높은 압력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혀와 오른 손이 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는 다시 추방 되었고 662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후에 사람들은 그를 향해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했다는 이유로 “고백자”라 불렀으며, 그의 신념은 680-6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침내 인정받게 되었다.

작금에는 세속적인 경력과 지위를 쌓기 위하여 칼바람이 부는 교계,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는 인상을 갖게 하는 지도자들, 신앙의 정절 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는 길에서 부스러기를 취하려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소한 유익을 위해서라면 신앙도 신의도 얼마든지 저버려도 된다고 행동하는 모습들에서, ‘이단이 어떤 자들이며, 사이비는 어떤 자들이고, 무엇이 타락인가?’ 하는 혼잡 속에서도 이를 논하는 자체가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된, 한국교회 앞에 “과연 교리가 필요한 것이며, 신앙의 정절을 논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 앞에 비단 동방교회라 하지만 진리를 위해 고난(혀와 손이 잘리는 등)을 마다하지 않은 ‘막시무스’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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