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역 광장에 세워진 소녀상.
▲ 소녀상 뒷편에 세워진 시비.

 

 

 

 

 

 

 

 

 

 

 

 

 

“추운 겨울 산속 빙판에 서서/얼마나 무서웠을까/얼마나 두려웠을까//모욕의 산/치욕의 산/짓누리는 무게로 견뎌온 한평생/젖는 날개/시퍼렇게 멍든 가슴/상흔의 한 어루만져//어린 소녀여/그대 이름은 나비/창공을 향해 비상하라”

이 시는 원광고등하교 김주훈이 일본군에 끌려가 온갖 모욕과 치욕을 당하며, 살아 돌아온 대한민국 소녀들의 당시를 생각하며 쓴 <나비소녀>이다. 이 시는 익산역 광장에 소녀상과 함께 시비로 세워져 있다. 태양이 내리쬐는 2018년 8월 15일 광복절 한 낮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외롭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그대로 받으며, 서 있다. 이 시간 서울의 거리에서는 일본군 장교로서 독립군을 향해 총을 쏘며, 일본에 충성했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외친다.

또한 연일 언론은 양승태 전대법원장과 청와대 간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놓고 한 ‘재판거래’에 대해 보도한다. 또 다시 대한민국의 법에 의해 이 땅의 소녀들이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를 않는다. 일본은 박근혜 정부와 맺은 위안부 문제 종식에 합의한 만큼, 이를 지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8월15일 광복절 73주년에도 이를 번복하고, 일제 36년의 침략에 대한 반성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인들과 아베 내각은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참배했다. 일본에 의해 침략을 당한 아시아의 국가들은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이 같은 모습에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보수단체들은 광복절에 거리로 나와 국정농단의 당사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요구하며,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마디로 이것은 일본의 만행을 망각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는 데 안타깝다. 참담하다. 이들이 서울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는 사이, 익산역 광장의 위안부 소녀상과 <나비소녀>의 시비 앞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침묵만 흘렀다. 무언의 시위인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시위에 참여한 기독교인과 사법농단을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법조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대한민국 국민인가. 아니면 일본의 국민인가. 아니면 일본과 대한민국의 이중국적자인가. 대한민국의 법원은 누구를 위한 법원인가. 일본국을 위한 법원인가. 아니면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법원인가”

분명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 말, 이 땅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은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한 채, 미래가 없는 복음을 전하며, 국적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일본의 협력자로서, ‘정교분리’를 주창하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항일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그리고 항일투쟁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한국교회 목사의 입에서 일본군에 끌려가 치욕과 모욕을 당한 생명의 담지자인 이 땅의 여성들을 향해 거침없이 ‘매춘부’라고 말하는가 하면, 장로라는 사람이 교회의 간증에서 “일제 36년을 하나님의 뜻” 등의 망언을 쏟아내도 침묵하는 것이 한국교회 아닌가. 오히려 이런 막말을 쏟아낸 인물에 대해 구명운동을 벌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다.

생각 있는 교인들과 국민들은 이런 교회의 모습에 실망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한다. 광복 73주년 정오 누구하나 찾아주지를 않아 쓸쓸하게 서 있는 익산역 광장의 소년상과 <나비소녀>의 시비 앞에서 굴절된 대한민국의 역사, 오늘도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하고, 국적 없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과 민족 앞에 죄를 짓지 말라고 촉구해 본다. 

광복 73주년을 맞은 2018년 8월 15일 정오 누구하나 찾아주지 않는 익산역 광장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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