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중세 말기, 로마가톨릭에서는 아담의 범죄가 전 인류에게 죄악된 경향성을 남겼지만, 자유의지가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다소 결함이 있어서 부족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중세 신학에서는 아담의 원죄를 받아들이지만, 그 영향력에 대해서는 총체적인 부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죄책이 죄악된 본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경향성이 마음과 의지에 영향을 미쳐서 은총과 합작하여 중생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가진 종교개혁자들의 주장들이 설득력을 발휘하게 된 배경에는 중세 말기 유명론과 르네상스와 기독교 휴머니즘의 시대를 거치면서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만 어거스틴의 글을 읽었던 것은 아니고, 중세시대 오랜 기간 동안 어거스틴의 저술들을 통해서 영향을 입어왔었다. 그러나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순종, 특히 성례에 관한 강요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이 제시한 구원론에 깊이 고무되어졌다. 워필드 박사가 이를 간파하여 어거스틴의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이기고 궁극적으로 승리한 사건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파악했던 칼빈은 바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여러 차례 칼빈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작동하고 있는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도 바울]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의지를 도우시고 부패한 의지를 교정시킬 뿐 아니라, 우리 속에서 의지를 갖도록 역사하시도록 하신다고 말한다 (빌 2:13). 이로 보건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의지 속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이 다 오직 은혜의 역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논지에서 칼빈은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인간의 공로로 의를 이룰 수 없음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약간의 공로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서 공로를 완전히 벗겨버리고자, 우리는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므로 (엡2:10) 우리는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음을 가르치며,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한 행실들이 다 본래 시초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 구원의 역사에 결코 참여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마치, 구원의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사람에게는 조금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은혜가 의지보다 선행한다는 뜻이라면, 의지를 가르켜 은혜의 추종자라고 부른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된 의지 자체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므로, 사람이 자기 의지로 그 선행하는 은혜에 순종한다고 보는 것은 그릇된 논리이다.... 바로 앞에서 바울의 바울의 글에서 보았듯이 (빌 2:13), 은혜가 그 의지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인류의 창조에 과도하게 집중하면서 낙관론을 펼쳐나가는 것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로마의 멸망을 목격했던 어거스틴은 인간의 타락과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에 관해서 철저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서로마 제국이 급격하게 멸망해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기에, 기독교 왕국으로서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접어버리고, 『하나님의 도성』에서 문명사의 재앙에 대한 성찰을 하였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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