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요한 목사

일부 신학자들은 분열과 갈등, 파괴와 무질서를 여기에서 멈추고, 자연과 하나님,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를 위한 행진을 벌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내려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회는 율법과 자신들이 만든 법 위에 군림한다, 하나님을 율법과 성전에 가두고, 마음대로 이용한다. 하나님은 언제부터인가 마술쟁이의 마술봉이 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라면 타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고의 능력도, 거룩한 실재도, 초월하신 인격신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고난에 동참하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신이다. 그는 전능성으로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다. 약함(십자가)으로 우리를 돕는다. 전통적 기독교 논리에 기초한 전지전능하신 신, 서구 기독교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식민주의의 신이 아니다. 중세 성직자의 신도 아니며, 개신교 신학자와 중대형교회 목사들만을 위한 신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적 맘몬주의에 길들여진 나머지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켰다. 현대사회에서의 왜곡을 극복하고, 상호간의 장점들을 발견, 서로 보완함으로써 교리가 서로 다른 교파들이 협력하여 복음 전파는 물론, 인류평화와 복지증진에 기여하는 선교의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 19세기 서양 근대사상의 일원주의에 기초한 선교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이 선교는 결국 제국주의, 신민주의 이데올로기 선교의 틀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교방향은 ‘증거에서의 대화’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적이며, 필연적이다. ‘대화를 통한 증거’는 오늘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이다. 이것은 한국에 세워진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해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길이며, 한국교회가 자기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길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민족적 정체성에서 찾기 보기보다는, 교파적 정체성을 찾는데 집중해 왔고, 지금도 이 틀에 갇혀 있다. 그렇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정체성과 기독교정체성(교파적 정체성) 간에 갈등을 빚고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 한국인이 된 것이 아니다. 또한 교파적 정체성의 구현은 한국선교초기 선교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초기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정책을 일본식민지세력보다도 먼저 주창해, 국적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했다. 그들은 민족의 문제, 역사와 문화를 몰각하고, 도피적인 태도를 철저하게 실천했다. 피압박민족에게 ‘개인구원’, ‘천당’, ‘복음전도’, ‘영혼구원’을 외치면서, 피압박민족의 민족의식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그리고 민족의식에 참여하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민족적 운명에 책임적으로 동참하지 못한 것은 물론, 교회와 역사가 유리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한 몫을 했다. 한마디로 경건주의와 각성운동을 신학적 배경으로 삼고 있었던 영미선교사들은 선교 목표를 ‘조선인의 영혼구원’에서만 찾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역사와 삶의 터전인 국가와 영토가 일본 제국주의의 신민지가 되는 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이라는 국가적 운명이 달린 투쟁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야심차게 벌인 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본식민지화에 직면해서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던 정치화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교회를 정치운동으로부터 정화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이 부흥운동은 선교사들과 그 추종세력들의 교회 내 교권 장악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한국개신교의 신학적, 신앙적 방향을 규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기독교는 게토화에 갇혀 스스로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예장 합동해외 총회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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