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동 규 목사

예수님은 정화되어 맑은 귀를 가진 사람만이 복음을 받아드릴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구원받은 자만이 나눌 수 있고, 섬길 수 있다. 이것은 성서의 경제관이고, 선교의 방향이다. 그리고 예언자적 전통과 예수님의 전통이다. 성서의 경제 질서는 아침 일찍 와서 8시간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사람이나, 똑 같이 대접을 받는 것이다.(마태복음 20장 1-16절) 능력 있는 사람이나, 능력 없는 사람이 자기 능력만큼 일하고, 삶에 필요한 것만큼 받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경제 질서이며, 기독교의 가치이고, 교회들이 세계 곳곳에서 선교하는 목적이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지고, 맘몬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마술봉으로 악용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예수님은 변방 갈릴리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들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의 선교 일성인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나라를 얻게 된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저희 것이다”(누가복음 6장20절),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블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냈다”(누가복음 1장52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장28절)고 했다. 그리고 부자들을 향해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태복음 10장25절)고 했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부자가 된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을 차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돌입해서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를 대상으로 돈 장사를 해서 부유해지고,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이 돈으로 고리대금업 등을 해 부자가 된다. 한마디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 금융자본이 가난한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교회와 한국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마술쟁이의 마술봉으로 만들어 교인들의 심리를 이용해, 교회당을 호화롭게 건축하고, 교인들을 불러 모은다. 교인의 수는 곧 부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마술봉으로 악용하고 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교인들이 목회자를 교회의 사이즈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돈이 있어야 총회장도 되고, 노회장도 되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야 장로도, 권사도, 안수집사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선교도, 봉사도 할 수 있다.

믿음과 신앙이 돈독하다고 해서 직책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돈이 최고이고, 돈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신앙의 척도는 믿음이 아니라, 헌금의 액수이다. 헌금을 많이 드리는 사람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보편문명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가져다가 준 추상적이고, 감사적인 하나님 나라, 천상의 삶을 외친 결과물이다. 그래서 한국교회 안에는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이 가로채 버린 것이다. 아담스미스는 “인간사회의 혼란과 고통은 신이 원하는 질서들을 파괴한데서 온다”고 했다. 교회도 질서가 파괴되면서, 교회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분열과 다툼만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혈전을 벌인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보라. 강동구와 중랑구를 보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에 빠져버렸다. 바울도 질서가 파괴된 교회를 향해 질서를 바로 세우라고 했다. 인간이 무질서하고,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계속해서 파괴되어 갈 수 밖에 없다.

예장 개혁선교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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