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집단의 고통은 극복은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서만 극복이 가능하다. 아무리 좋은 방안이라도 구성원들의 동의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그 과정 과정마다 구성원들이 직접 감당해야 하는 나름대로의 몫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 하나하나를 제대로 감당될 때 전체적인 그림이 퍼즐처럼 완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은 “훗날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다”라거나 “지금은 변화를 위한 고통의 기간”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독선적인 정치적 나르시즘이다. 후대의 평가는 후손들의 몫이므로 그 평가 때문에 지금의 구성원들이 까닭없이 고통당할 이유가 없다. 또 변화를 위한 고통이라는 명분으로 지금의 구성원들에게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도 명분과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한 불가한 주장이다. 후대의 평가를 이야기할 때도 집단의 결의가 필요하며, 변화를 위한 고통도 집단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의 경제난, 취업난, 주택대란에도 내각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선출된 이해찬 의원은 제364회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변화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한 동안 견뎌내야 할 고통스러운 전환기를 지나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수많은 미사여구 중에 유독히 눈에 띄는 것은 국민소득4만불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747공약이 생각나서 허탈한 웃음을 흘릴 밖에 없는 것은 집권당 대표의 현실인식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하는 절박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무엇을 위한 변화이며, 왜 변화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위한 제안이 없다. 오직 치열한 대결구도는 명백하게 형성되어 있고 그것에 대한 적개심은 넘친다, 그러면 그 변화는 일방이 일방을 제압할 때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고, 그 완결은 일방을 완전히 현실무대에서 일소할 때를 말하는 것인가? 누가 그것을 변화라고 정의해 주었는가?

지금 국민들은 경제적 위협과 일자리 고통 속에 주택난까지 겹쳐 허덕이고 있다. 남북문제가 가지고 있는 휘발성과 폭발성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과 경제성장과는 직접적으로 무관하며 오히려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신되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적 대결과 남북문제에만 매달리고 있는 범집권층의 관심은 오직 장기집권의 의지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금은 국방외교와 기업경제와 국민복지 그리고 교육과 국가기간산업 육성을 위해 써야 한다. 즉 세금으로 무더기로 공무원을 채용하고, 개인기업의 사원들의 임금을 보존해주는데 쓰면 안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고 자본주의 국가이며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기업여건을 개선하고 활동을 보장해 주어 기업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 세금을 써야 한다. 지금 이 정부는 자본주의의 ABC도 모르는 듯하다.

우리 국민이라도 정신을 차리자. 국가가 못하면 우리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다. 표플리즘적 민원에는 즉각 반응하면서도, 권력이 지향하는 바에 반하는 민원은 갈데까지 덮어두는 무례한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필요하다. 수만명의 자영업자들이 그 뜨거운 땡볕에서 울고 있어도 지지층의 이탈이 무서워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과연 이 정부가 지향하는 소위 적폐청산과 변화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필자는 법의 심판대 앞에선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심판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그들은 역사 앞에서 적법한 법적 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 정권이 다시 그들과 똑같은 길을 가려고 한다면, 반복될 후손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도 새로운 저항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민심은 아주 무겁게 천천히 그러나 강력한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 집권층만 모를 뿐인 듯하다.

그리스도대학교 전 총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