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양녕대군’은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의 맏아들로, 이름은 제요, 자는 후백(후백)이다. 그는 태종 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실덕이 많다 하여 태종 18년에 폐위 되었다.

그 후 ‘양녕’은 정치와는 담을 쌓고 주유천하로 풍류를 즐기면서도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녕’은 조선 초 격변기 속에서 스스로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자기보다 월등한 ‘충녕’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자 미치광이 짓을 하였다고 한다. ‘충녕’이 왕위에 오르자 살아 있는 폐 세자는 위험한 인물로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세종은 형을 믿었고 ‘양녕’ 또한 오해받을 짓을 하지 않았다.

그 때 그는 도성 내에 들어가지 않고 한강 남쪽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동생인 상감이 나라를 잘 다스려 주기만을 빌면서 남으로 내려갔다. 이 때 등을 돌려 남쪽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이란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한 번은 ‘양녕’이 한바탕 사냥을 끝내고는 둘째인 ‘효령대군’이 불도를 닦는 사찰에 들러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효령대군’에게 물었다. “불도는 닦아서 무엇에 쓰려는가?” 이에 ‘효령’이 대답 했다. “성불하려고 닦습니다.” 그러자 ‘양녕’은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것참 잘 되었다. 이 몸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니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리겠느냐?” 이렇듯 ‘양녕’은 거리낌 없는 인생을 산 사람으로 유명하다. 생각해 보면 ‘양녕’의 지헤와 양보심이 아니었더라면 “세종대왕” 같은 성군은 없었을 것이며, 형제간의 우애와 금도가 따뜻한 일화 또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출처 : 조선의 시지프스들)

참으로 ‘양녕대군’이라는 인물의 겸손이 조선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왕(세종대왕)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비단 왕족의 계승이 아니라 해도, 모든 기관의 지도자들이 선출 되거나 임명되는 과정에서도, 그 형편과 과정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떤 인물이 국정을 이끌어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선 왕조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시대의 당파싸움만을 연상케 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을 돌아보고 나라의 미래와 민족애를 마음에 두는 지도자를 기대하는 일은, 백성들 마음에서 조차 사라진 것일까? 본인들의 생각에도 전혀 국정의 일선에 나서서는 아니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에 사로잡혀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많아진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찌 될 것이며, 백성들 또한 어찌 될 것인가? “백성이란 그저 배만 부르게 하면 돼?”라는 인식이라면, 지도자의 자리에서 한 걸음씩 물러서는 것이 곧 애국이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아닐까?

백성들을 사육되고 있는 애완동물들과 같이 여겨진다면, 그 삶이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일제의 수탈 때에도 배만 부르면 사냥개 노릇을 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하여 통곡의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어보지도 못한 우리 부모 형제들이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작금의 정치, 경제, 종교 등 그 어느 한곳이라도 전혀 다를 바 없는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음에 앞이 깜깜해 진다. 따라서 거짓말을 참이라고 우겨대며, 다중의 동조자들을 규합하면 그 것이 참이 된다는 생각일랑 아예 불태워 버리자! 그리고 이 순간도 양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뒤안길에서 슬피 울고 있을 것이니, “그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 줄까?”하며 기도를 드린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6:10)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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