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독론의 혼돈

▲ 김재성 목사
이러한 증언들과 함께 18권에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인들에게 바리새인에 속한 자신의 관점을 소개하고자 노력한 사람이었고, 1946년에 발굴된 쿰란 공동체의 성경 필사본, “사해 사본”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요세푸스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초대교회의 배경이 되었던 유대인들의 역사에 관해서 광범위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책들은 수도원에서 필사본으로 만들어져서 계속해서 초기 기독교의 세계에 널리 퍼져나갔고, 해설과 편집이 지속되었다.

카나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예수는 없다」 (현암사, 2001)는 파격적인 제목과 내용을 펴냈다. 그는 정통 기독교 신학자가 아니라 종교학자이기에, 그저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취급하는 소위 비교종교학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기독교 신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복음에 대한 신앙적인 접근방법은 종교다원주의와 상대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정작 자신의 일반적인 종교연구 방법론에다가 정통 기독교 신학을 비판하는 시각을 대입하고 말았다. 그는 기존의 모든 성경해석과 성경의 신빙성에 대해서 거부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고 따르는 필자의 대답은 “예수는 있다”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이요, 완전한 사람이다.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문서비평학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교수, 수도사, 철학자라 하더라도 정통 기독교가 믿어온 기독론을 완전히 거부한다. 오 교수는 예수란 그저 인생의 “동반자”요 “길벗”이 되어서 깨우침을 주는 분이라고 말한다. 완전히 동양종교의 해석을 따라서 핵심개념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는 예수님의 역사성을 탐구하다가 몰락해버린 18세기 유럽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가설들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예수님에 관해서 제시된 모든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고백과 신앙을 부정하고 있다. 정통 신학자들이 소개하는 구세주 예수란 꾸며진 이야기로 취급한다. 종교를 연구하는 자에게는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란 그저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그는 예수를 그저 현명하고 좋은 조언을 주는 “동행자”로, 노자,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처럼 그저 길동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심취한 어떤 여성도는 잘 다니던 교회를 부정하더니만 유교, 불교, 기독교를 혼합하여 명상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무엇이 진리이며 어떤 것을 명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게 깨달음이라고 하니, 계속하여 헛바퀴를 돌리고 있는 다람쥐처럼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터이다.

예수님의 출생부터 시비를 건다. 동정녀 탄생이란 성적인 행동을 죄악시하는 어거스틴의 신학이 만든 것이라고 단정한다. 여자가 처녀막을 손상당하지 않고도 아이를 낳았다는 말은 영원 처녀설의 근거이며, 이것은 오늘날 로마 가톨릭의 성모 숭배를 가져왔다는 식이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동정녀 탄생이란 “대부분 불확실하고, 서로 모순되고, 심히 전설적이고, 궁극적으로 신학적인 동기를 가진 이야기이다”고 주장하였으니, 합리적 이성에 따르는 인본주의가 신앙과 초월적인 하나님의 세계를 완전히 장악해 버리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기록들을 부인하는 신학이 세력을 얻게 되면서 종교다원주의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말았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가서 호적하라는 가이사의 명령에 따라서 요셉과 마리가 먼 길을 여행한 것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다. 그런데, 현대 종교학자들은 이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그러면 고대 시대, 특히 로마의 모든 명령서들과 고대시대의 행정적인 공문들이 다 문서보관실에 자료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일까? 의심하는 자들은 비단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뿐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다윗 왕에 대해서도 성경 외에 그 어느 곳에도 고증을 할만 재료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여 의심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에서나 인류학자들의 고증으로 충분히 입증되는 역사적 객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하여 그가 실재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신성에 대해서 회의하는 자들은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별이라든지, 이동경로, 여행의 가능성 등등 모두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 먼 길에 어떤 동물을 타고 왔는지? 헤롯이 아이들을 죽인 것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 모든 것들이 의문투성이인가? 그렇지 않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헤롯 대왕의 통치와 폭정은 모두 다 역사에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구레뇨가 유대지방의 총독이 된 것은 주전 6년 전이고, 호적을 하라고 명령을 한 것은 주전 4년 전 일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을 이해할 수 있는 성경 밖에 자료들 중에는 요세푸스의 기록들이 남아있다.

<다음호에 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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