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빛은 다양한 파장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빛도 있고 보이지 않는 빛도 있다. 실제로는 보이는 가시광선보다 보이지 않는 불가시광선이 더 많고, 인체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불가시광선을 보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넓고 진실에 가깝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고 “나는 이제 새사람이 되어 살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그로부터 그는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담금질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남의 목숨도 빼앗을 권리를 갖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근 언론(한겨레)에 드러난 ‘에스더 기도운동’을 보면 믿음의 열정이 과연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멸족 당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에 처한 동족을 구명하기 위해 목숨 걸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에스더의 열정을 누군가를 죽이는 데 사용한 것이 드러나서이다. 그들은 북한, 이슬람, 예멘난민, 동성애라는 구체적인 적을 상정해놓고 끊임없이 차별과 혐오를 일삼으며 가짜 뉴스를 만들어 내는 공장 역할을 했다. 민주세력을 공격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인터넷 댓글을 다는 연습을 시키는 ‘미디어 선교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에게서 예수 정신을 찾아볼 수 있을까? 어쩌면 처음에 이들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소명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던 이들이 점차 내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동성애와 같은 불결함으로부터 순결을 지키고, 나아가 하나님을 ‘지켜드린다’는 자기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아래 겸손히 머리 숙이는 자들이 된 게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지켜드리는’ 정의의 전사가 된 것이다. 성경이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의 하나만 가지고는 참된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정의와 더불어 사랑도 있고, 인간애도 있어서 그것들이 잘 어울려야 정의가 올바로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다 있어야 하지만 그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기 눈으로 보이는 세계를 전부로 여기고 심판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야말로 내가 하나님을 ‘지켜드린다’는 망상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잊지 말 일이다.

삼일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