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온갖 경제 지표가 적신호에 경고음을 울리고,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흉악한 인명살상의 패륜에 기분이 스산한 계절이다. 다가서는 겨울 느낌의 찬바람을 탓해보지만 굳이 찬바람이 아니라도 서글픈 생각이 드는 10월의 마지막 날에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가장 소중한 것들이 망가지고 있다는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캠퍼스를 서성거리다가 바람에 날아오는 짙은 국화향을 느끼고 국화 예찬이나 해야겠다.

국화는 모두가 좋아하는 선선한 가을꽃의 대명사로 가장 많이 팔리는 꽃이란다. 꽃잎 하나하나에 암술과 수술이 다 들어 있고, 잎 하나만 떼어 부드러운 흙에 꽂아도 뿌리가 내리고, 한 번 심으면 몇 년은 꽃을 볼 수 있는 것은 특징이다. 그 고결한 자태나 향기는 백화(百花)의 으뜸이라. 묵객(墨客)들이 그 매력을 품위있는 덕성(德性)으로 노래하며 국화주를 즐겼으니 그 낭만또한 으뜸이라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여겨짐이 그런 연유이다. 또 꽃닢은 베개 속에 넣어 중풍을 다스리고, 잎은 태워 약으로도 쓰고, 영초(靈草)로 여겨 축귀(逐鬼)의 수단으로 사용했고, 120~130세까지 무병장수케 하는 효험이 있다니 그 덕(德) 베품이 작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국화 예찬이 여기쯤 이르니 문득 내년 봄에 다시 볼 국화의 친구 민들레도 생각났다. 닮기도 그렇고 수수하기도 닮아서 ‘안질 방이’, ‘지정’이라 불리기도 하는 국화과의 다년 생 초본인 민들레 예찬도 싫지 않음이다. 살펴보니 민들레의 덕스러움도 국화에 못지않다. 민들레는 아홉 가지 덕을 갖춘 구덕초(九德草)라 불리니, 모진 환경에서도 핀다함이 첫째 덕이요, 짓밟아도 뿌리를 난도질하여도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이 둘째 덕이며, 피고 지는 것이 순서가 있다하여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셋째 덕이며, 천기를 분간하여 어둠과 비와 구름이 몰려들면 꽃잎을 닫으니 선악을 분간한다함이 네 번째 덕이며, 벌들이 몰려들게 하는 꿀이 있어 다정(多情)함이 다섯째 덕이며, 새벽에 가장 먼저 꽃잎을 여니 그 근면함이 여섯째 덕이며, 그 씨가 멀리 날아 자수성가(自手成家)함이 일곱 번째 덕이요, 한약의 ! 귀한 재료가 되는 덕을 베풂이 여덟 번째 덕이요, 나물과 음식의 재료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이 아홉 번째 덕이다.

해서 발끝으로 툭툭 차던 그 흔한 국화와 민들레가 이만한 영초(靈草)라니 그간의 소홀한 대접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국화 한 송이를 내려다보며 매일 매일 달라지는 세상의 변덕스러움에 지치고, 긴장과 탄식과 환호에 찌든 나 자신을 돌아본다. 벌써 시간은 10월의 달력을 조각내며 무서운 속도로 내리달리지만,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민들레나 국화처럼 그렇게 평범하다. 내년에는 이 불안이 가실 수 있을까?

말로만 국민과 코드를 맞추는 대통령, 이상과 야망에만 가득한 어리숙한 참모들에 의해 국민을 마루타로 여기며 계속되는 정치실험, 실속도 목소리도 맥이 없는 못난 야당이 만들어 내는 정치코미디, 줄줄이 무너지고 쓰러지는 기업들, 그런 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북문제에만 매달리는 한가한 고관대작들,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가장들, 직장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청춘들…!

어떠하겠는가? IMF에 절규하며 온 국민이 금 모으고 땀 모아 구해낸 이 나라가 어쩌다 또 다시 각종 지표가 그 시대와 방불하다 하니 이 기막힌 현실을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그래도 이 땅의 민초들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영초, 구덕초의 효험 때문인지, 그런대로 잘 견뎌내고 있구나. 그래 조금만 더 견디자. 이왕 내친걸음이다. 국화 옆에 퍼질고 앉아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가난한 가슴도 열어 보이면 이 계절에 심(心) 깊은 우정과 사랑들이 영글지도 모른다. 내년 봄에나 필 민들레를 만나면 내 손끝에서 수난당한 오늘 가을의 국화가 또 그리워지려나?

그리스도대학교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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