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제주도 여행가는 줄만 알고 엄마를 따라 나섰던 3살 된 여아가 제주도 해안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며칠 후 이 어린이와 같이 제주에 간 30대 엄마는 제주항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모녀의 뉴스를 접한 국민들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분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예수님은 “어린이는 하나님나라의 보화이며, 누구도 털끝 하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이들(어린아이)의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을 향해 ”내게 오는 아이들을 막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는 이 땅의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 의해서 왜 죽임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는가. 그만큼 우리의 사회와 가정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보살피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제주 해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3살 된 아이는 택시를 타고 내렸을 때만 해도 분명 엄마와 아름다운 여행을 꿈꾸었을 것이다. 3살 된 아이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누구도 모른다. 추측하는 것은 죽임을 당하면서, 자신에게 몰려온 고통이었을 것이다. 왜 이 땅의 아이들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사랑해서 낳은 아이를 왜 부모는 죽임을 당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살기 힘든 세상에서 아이도 자신과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

엄마의 행방에 대해 국민들은 많은 것을 추측했다. 그리고 경찰과 국과수는 아이의 사인이 무엇인지 더 조사해야 한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모녀가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얼마나 삶에 지쳤으면, 아이와 죽음을 선택했을까. 안타까울 뿐이다. 이 엄마의 부친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며,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이 엄마의 남편이 누구냐는 경찰의 질문에 “없다”고만 했다.

그렇다면 이 엄마는 미혼모인가도 생각이 든다. 혼자서 아이를 키울 용기가 없어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이 엄마는 한 달 이상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렇게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제도적인 장치는 없는 것일까.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혜택이 있음에도, 모녀가 왜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 모녀에게 는 진정한 이웃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만큼 우리국민은 인정이 메말라 버렸다는 것이다. 만약 이웃이 이 모녀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 모녀 역시 최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죽임을 당할 때마다 공분을 사지만, 정작 죽임당하는 아이, 학대에 노출된 아이들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제주도 화려한 여행을 간 어린 아이도, 국민적 공분은 물론, 추모의 물결이 줄을 이었다.

국민들은 죽임당한 아이를 살려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고 추모 행렬에 참여했다. 제주도에 입도할 때 왕복표가 아닌 편도표로 입도한 것, 마켓에서 우유와 컵라면, 번개탄, 부탄가스, 토치, 라이터를 구입한 것에 대해 조금의 의문만 가졌더라면, 이 모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아쉬움이 남는다. 안타깝다. 그렇다 오늘 우리사회는 이웃이 없다. 혼자 살기에 각박하다.

이 엄마 역시 자신을 개방해서 주고, 받을 이웃이 없어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사회는 인정이 메말라 버린 사회이다.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잃어버린 사회이다. 우리가 건강한 사회, 건강한 가정을 꿈꾼다면,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을 향해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아픔을 듣고, 볼 수 있는 맑은 귀와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실현하려고 했던 하나님나라가 아닌가.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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