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에라스무스는 그 어느 때나, 어느 글에서나 결코 어거스틴을 칭송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아담의 원죄와 그 직접적 유전을 강조한 어거스틴과는 달리, 에라스무스는 『엔키리디온』(Enchiridion, 기독교 군사의 교본, 1518년)에서 오리겐의 인간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인간에게는 창조성과 존엄성이 있음에 더 무게를 두면서, 인간의 이성적 활동과 교육을 통해서 주어지는 지식을 강조했다. 에라스무스가 전형적인 인문주의적 낙관론을 피력한 것으로, 보편적인 교육과 사회적인 개선을 진행하면 전쟁을 포기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이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사상의 근원적인 뿌리였던가를 들여다보자. 에라스무스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대한 오리겐의 해설을 받아들였다. 헬라사상의 이원론적 사고 구조에서 영향을 받은 오리겐이 인간의 세 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육체만 철저하게 타락했고, 영은 여전히 그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영을 강조하면서 휴머니즘적인 낙관주의를 장려하는데 매우 유용한 기반으로 오리겐의 해석을 활용했다. 에라스무스는 헬라적 기독교를 자신의 사상적 근간으로 채택하였다. 이것은 지식적으로만 확장된 중세말기의 또 다른 변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시대에 어거스틴의 글을 읽었던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원죄와 부패한 본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해서 낙관적이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오고 있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에서 마틴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격돌하게 되었다.

루터의 반격에 깊이 상처를 받은 에라스무스는 1526년 6월에 『자유의지 옹호』 (Hyperaspistes diatribae)에 이어서, 제 2차 반론을 1527년 9월에 출판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연이은 공격들은 다소 난해하기도 하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지성사회에서 종교개혁과 로마가톨릭을 모두 다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가, 양편으로부터 불신을 받아서 비극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양쪽 모두의 비판으로 완전히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4. 칼빈과 영적인 무능력의 재발견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칼빈은 루터의 기초적인 저술들을 근간으로 삼아서 보다 성경을 더 면밀하게 검토하여 기념비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특히, 칼빈도 여러 논쟁들을 거치면서 차분하게 로마가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칼빈에 의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 더욱 더 상세하게 밝혀졌다. 칼빈은 기독교 신학사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가장 비관적으로 “전적 타락” 혹은 “전적인 부패”(total depravity)의 개념을 강조한 신학자로 알려졌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해서 오염되어졌고, 전인격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고 말았음을 상세하게 풀이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전적 타락에 대한 개념과 용어는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졌고, 어두운 측면만을 강조하는 쪽으로 풀이되고 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다 죄와 연계되어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행동들이 모두 다 죄악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총체적으로, 광범위하게, 종합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전죄와 죄책 아래 있다는 말이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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