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검사가 겁을 먹고, 판사가 두려움에 잡히면 이 땅의 사법적 정의는 길을 잃고 만다. 비록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되고, 판사가 여론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판결할지라도 그래도 민주사회에서 국민이 최초로 호소할 수 있는 데가 검경(檢警)이요, 마지막으로 기대해 보는 곳이 법원이다. 특히 검찰은 경찰 수사지휘기관으로 삼권분립에서 막강한 위력을 가진 행정부 권력의 한 축이다. 이런 의미에서 검찰은 군과 더불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스스로 지켜내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검찰청, 그것도 대검찰청이 위협받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 대검찰청 청사를 기습 점거한 민주노총 비정규직 노조지회 간부 9명 중 자진 퇴거한 3명을 제외하고 6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대검 청사 밖에서는 민노총 소속 비정규직 근로자 110명의 집회가 이어지고 있었다. 더 쓴 웃음이 나오게 하는 것은 경찰 480여명이 출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보는 필자의 뇌리 속을 파고드는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잇고 떠올랐다. 검찰이 조직 최상부 기관 로비에서 불법적인 시위가 벌어졌는데도 수수방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 검찰을 이렇게 무력한 조직으로 만들었는가? 그렇게 약화된 검찰로 인해 가장 이득을 취할 곳은 어디일까? 과연 우리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을까? 우리도 필요하면 대검찰청으로 달려가면 될까?

지켜볼 것이다. 검찰과 경찰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지를, 그리고 향후 사태를 어떻게 대응하는 지를 유심히 확인할 것이다. 오직 검찰만이 민주적 가치와 공평한 권리 그리고 부당한 절차에 관하여 사법적 책임을 위해 기소권을 가지고 있다. 이 기소권이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강제된 협박과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무슨 이유로든 이를 간과한다면, 스스로 무한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검찰의 위치와 권능은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 질서와 가치를 부정하는 모든 인격을 그 처벌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 수사권은 정상적인 행정체계를 따라 운용되어야 하며, 만일 특정집단이나 힘있는 개인에 의해 작동한다면 이미 이것은 더 이상 민주검찰이 아니다. 검찰 스스로 이런 명예와 자부심을 지켜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응하는 검찰을 보면 그들의 명예와 자부심은 던져버린 지 오래라는 인사을 지울 수 없다. 가슴 아픈 일이다.

언제부터 민원공화국이라는 말이 생겼다. 공무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민원이다. 민원이 무서워 부당한 요구와 어거지 행동에 대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다. 민원이 법과 제도위에 있다고 믿는 이들에 의해 정상적인 절차와 규정은 유린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행정기관은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할 뿐 이를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그나마 그것을 거둬 잡아야 할 검경마져 민원의 표적이 되었으니, 그럼 앞으로 대검찰청 수뇌들의 전정긍긍을 보게 된다는 말인가?

안된다. 필자는 민노총의 주장과 활동에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민주사회에서 그들에게 보장된 권리를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과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것을 막아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검찰청으로 법원으로 달려가는 행위는 용납할 수가 없다. 또 힘으로 검찰과 법원을 누르고자 하는 것에는 그들 스스로 많은 약점과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을 보인 그들을 더 이상 이 민주사회의 정상정인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 수 없다.

문제의 제기에도 한계와 상식과 절차가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그 민주주의를 집행하는 권력이 검찰이요, 민주주의를 지키는 곳이 법원이다. 지금 이 나라가 독재와 정통성없는 권력이 통치하지 않는 이상, 검찰과 법원은 그 어떤 이익집단에 의해 위협받아서는 안된다. 그 위협은 곧 국민에 대한 위협이며, 지금 이 나라를 독재와 정통성없는 권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민노총의 깊은 고민을 촉구하는 바이다.

그리스도대학교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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