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정 재 영 장로
지금은 열을 가스나 전기 등을 사용해서 구한다. 그러나 오래되지 않는 조금 전까지 연탄이 주종을 이루었던 때가 있었다. 

 에너지를 다 사용한 연탄 찌꺼기를 연탄재라고 한다. 이것은 쓸모가 소진된 물건이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내버려야만 한다. 이 시에서는 연탄재란 사용용도가 끝난 폐기물로, 그런 대상에 대한 총체적 비유로 들고 있다. 좁은 의미로 보면 연탄재는 폐기된 모든 대상이지만 마지막 행을 보면 구체적으로 쓸모가 없어진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의미가 분명하다. 

연탄재는 한 때 뜨거움을 주었으나 연소가 끝나서 생명이 끝난 이미지로 동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소용이나 쓸모가 없는 사람, 즉 뜨거움이 없는 사람은 마치 연소가 끝나버린 연탄재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사람은 연탄재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뜨거움이란 무얼 지칭하는 걸까. 물론 정답은 없지만 사랑이나 열정을 의미한다고 해도 그리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무생물인 연탄재를 발로 찬다 한들 크게 이상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단지 치우기만 불편해질 뿐이다. 같은 의미에서 사랑이나 열정이 없는 사람은 연탄재보다 더 가치가 없는, 그래서 연탄재라도 함부로 다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사람은 연탄재보다 못하다는 걸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은 연탄재의 비천함과 사람의 고귀함을 역설적 위치로 설치하고 있음에서 기인한다. 이런 새로운 착상, 곧 그 기발성을 컨시트(기상)라 한다. 이런 착상이 작품 안에 담겨져 있을 때 비로소 우수한 시로 창작되는 것이다. 

사람을 연탄재에게 비유한다는 것은 좀 지나친 면이 있을 수 있다. 왜냐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고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얼마나 귀하면 그 가치 유지를 역설적 논리로 전개하고 있겠는가.  

 한 가지 부연한다면, 형식상에서 볼 때, 짧은 시는 더욱 감칠맛이 난다. 시의 생명 중 하나인 응축이란 면에서 더욱 그렇다. 이것은 함축미를 생성시키기 때문이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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