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페르시아아의 고레스는 바빌론에 억류됐던 유대인 포로 일부를 귀향시키면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도록 한 바 있다. 그 뒤를 이은 아닥사스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포용 정책을 펴고 억류된 유대인을 귀환시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귀환하는 무리 가운데 율법학자 에스라를 포함시켜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도 돌보게 했다(에 7:11-26). 이로 보면 아닥사스다는 유대인 못지않게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동기야 어찌 되었든 바빌론 포로였던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포용 정치에 힘입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곽을 복원하고, 율법을 모법으로 삼아 나라의 법체계를 세우고 자치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와 같은 페르시아의 보호망 속에서 유대교라는 종교가 태어나게 된다. 그렇게 이방 나라의 포용정책에 힘입은 이들이 후대에 이르러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등 세상에서 가장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종교 집단이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물론 헬라 문화와 외세의 지배 하에서 자기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던 연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문제는 그들의 배타성이 유독 내부의 사회적 약자에게로 향했다는 점이다.

시대가 흘러 또 다시 역설적인 일이 일어난다. 유대 땅에서는 사라질 뻔했던 모세 율법이 바빌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져 유대교로 태어났듯이,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복음이 세계의 도시 로마에서 세계화된 복음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역사가 토인비는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순환 가운데서 발전하는 것으로 본 바 있는데, 하나님의 구원 사역 역시 고난과 역경을 창조적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설에 의해 발아하고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남과 북은 분단 체제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문제는 이 모든 키를 쥐고 있는 미국이 저 옛날 포용정책을 쓴 페르시아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민족을 압살했던 바빌론 역할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미국이 분단을 해소시켜서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리라 믿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미국에 의해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구원사건의 역설은 지금도 상존하기에 하는 말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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