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칼빈이 가장 주목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우상숭배로 전락한 모습이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을 품고서 참된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도 전에 그 나무는 잘라져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롬 1:18-23). 인간은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아담에 주셨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진 그릇”(a shattered vase)처럼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결국 칼빈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주장한 바를 요약하면, 우리 인간이 스스로 죄인이 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모든 원하는 것들은 그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이미 죄악에 관계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의지는 죄의 굴레에 완전히 묶여 있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 없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움직임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시초인데, 성경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이끌릴 수 밖에 없다는 내 말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의아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타락에 의하여 부패하였을 때에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며 외부로부터 어떤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죄를 지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본성은 너무나 부패해 있어서 오직 그는 악을 향해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람이 분명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로마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신인협력설에 대해서는 피터 롬바르드가 왜곡했다는 점을 강력하게 논박했다.

의지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선을 대적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회심한다는 것 을 인정하면서도, 일단 그렇게 준비를 갖춘 다음에는 의지가 활동하는 데에서 자기 몫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이 가르쳤듯이, 은혜가 모든 선행에 먼저 작용하는 것이며, 의지는 은혜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추종자로서 은혜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 이 거룩한 분은 전혀 악의가 없이 그렇게 가르쳤는데, 피터 롬바르드가 이른 터무니없이 왜곡시켜서 그런 뜻으로 만들 어버린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들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의지가 과연 남아있는가?

그래서 선행을 하고 공로를 세우고자 스스로 노력하면서 특히 수도원이나 은둔처에서 독신, 기도, 명상, 순례, 고행, 헌금 등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업적을 세울 수 있을까?

인간의 본성은 죄로 얼룩져서 하나님이 창조할 때 주셨던 거룩성을 상실하였기에, 스스로는 구원에 이르는 선한 공로를 세울 수 없다.

타락하기 이전에 인류는 선한 의지를 가졌으나, 타락 이후의 인간은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을 한다하더라도, 죄에 의해서 얼룩져있다. 심지어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동기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인간의 의지는 자만심과 교만함, 자기 의로움과 타인에게서 오는 평판 등으로 얼룩져있다. 사람의 죄성은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적 능력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래는 사람과 만물을 선하게 지으셨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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