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신문
칼럼
[김창주 교수] 구약성서의 평화 이해
김창주 교수  |  webmaster@ck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12.24  09:41:3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블로그 구글 msn
   
▲ 김창주 교수.

I. 여는 말

구약성경에 샬롬은 동사로 103 차례, 명사로 343 차례, 형용사로 36 차례 등 모두 480 여 회 나온다. 한글로 평화, 평강, 평안, 화평, 문안, 번영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개인이나 공동체, 육체적이나 영적인 의미로 폭넓게 쓰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샬롬은 소극적 의미의 전쟁이 없는 상태나 단순한 평온한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균형과 조화의 온전한 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샬롬의 사전적 풀이나 일반적인 분석 대신 구약성서 전체에서 관찰되는 흐름과 역동적 의미를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빈번하게 쓰인 샬롬에서 뚜렷한 통일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면면히 이어지는 일관적인 흐름이 감지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구약의 평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이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샬롬이란 독자적이면서 자급자족적이고 동시에 결핍감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위와 같은 샬롬에 대한 정의는 다음의 세 본문을 평화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사야 11장, 미가 4장, 그리고 시편 72. 먼저 기원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평화의 원리 또는 궁극적 관심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사야는 건축가처럼 자신의 믿음과 정신을 담아 평화에 대한 청사진을 그린다. 이 청사진에는 예언자가 꿈꾸는 평화의 이상이 아름답게 담겨있다. 이사야 11장은 마치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설계하듯(출 31:2,6; 36:1) 평화의 세상 곧 유토피아에 대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세심한 필치와 그림 언어로 묘사한다. 사실 이사야 11장의 환상은 아무나 그릴 수 있는 이상향이 아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예언자이던 이사야의 현실적 고민과 미래에 대한 꿈이 담긴 평화로서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평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편 이사야와 거의 같은 시대 미가는 전쟁 무기를 농기구로 변환시키는 대전환을 선언한다. 곧 폭력과 살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평화의 구체적 실행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단계는 오홀리압 같은 뛰어난 기술자의 몫은 물론이려니와 공동체의 참여가 필연적이다(출 36:2-3). 건축가는 도면에 구현된 설계 정신과 목적을 읽을 줄 알아야한다. 더 나아가 적재적소에 맞는 재료를 선별하여 한 치의 빈틈없이 작업해나간다. 이렇듯 설계자의 청사진은 건축가가 벽돌을 쌓고 외관을 장식하며 마무리 작업까지 성실한 과정을 거쳐야한다. 그 과정에 적절한 부품이 없다면 장인이 직접 고안해서 만들어야한다. 미가는 평화를 위해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칼을 쳐서 낫으로 바꾸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한다. 미가의 평화는 구체적이며 실천적이다.

그런가 하면 시편 72는 성막이 완성되자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듯(출 40:34) ‘주의 판단력과 주의 공의’로 세상을 다스릴 왕이 불현 듯 나타난다. 왕은 공의로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평강을 베푼다. 그러자 사람들은 한편으로 (평화의) 왕에게 이끌려오며 다른 한편으로 다시스와 섬과 달까지 평화의 힘이 퍼져간다. 이렇듯 시인이 맛보고 누리는 평화는 주변 환경은 물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시편 72의 평화는 강한 흡인력으로 내면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놀라운 팽창력으로 세상에 두루 퍼져나간다. 시인의 평화는 결국 내적으로 끌어당기는 힘과 외적으로 퍼져나가는 힘의 협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II. 평화의 설계: 이사야 11장 1-9절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평화를 위한 프로젝트의 수립과 실천이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때 이사야 11장은 ‘터무니’ 곧 밑그림에 해당한다. 즉 이사야의 환상은 평화의 원론이지만 동시에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한 것으로 평화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이사야가 제시한 ‘청사진’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탄한다. 공상처럼 보이는 평화의 세상을 공감하며 한번쯤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 터무니는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외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 사용자의 편리를 최대한 반영한 공간 배치, 격조 있고 우아한 내부 장식 등은 이른 바 ‘평화의 조감도’(airscape)라고 부르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다.

이사야는 자신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한 예비 작업을 줄곧 해왔다. 예컨대 1장은 시온의 회복(26절), 2장은 ‘여호와의 산’에서 이뤄질 종말론적 회집(1-4절), 4장은 심판의 ‘그 날’, 7장은 상호 절대적 신뢰(7,9절)와 임마누엘의 징조(14절), 그리고 9장은 메시야의 의로운 통치(6-7절)를 예고한 후 11장에서 앞의 선포한 내용을 압축하여 평화의 설계도를 작성한 것이다(1-9절).

기원전 722년과 587년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다윗 왕조가 대제국의 말발굽에 무너졌다(왕하 17:5-6; 25:22-24). 두 왕국의 멸망으로 그들은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절망과 공포를 자극하는 전쟁과 좌절의 세월을 한 동안 견뎌야했다. 이렇듯 어수선하고 불안한 시대에 이사야는 이새의 뿌리에서 공의로운 세상 곧 평화의 나라가 오리라고 선포한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 11장의 장면은 평화의 이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언이다. 예언자가 제시한 평화의 모델은 먼저 평화의 주체가 누구인지 밝힌다. 그것은 곧 2절에 언급된 ‘여호와의 영’이다. 다음은 평화의 실체가 ‘공의로운 통치’(3-5절)와 ‘공존과 상생’(6-9절)이라는 두 단계 또는 이원적 이미지로 제시된다. 전자는 평화의 내적인 상태로서 공의로운 심판과 통치가 실현되는 평화의 세상이다. 물론 그것은 3절의 언급처럼 눈과 귀에 의존하는 가시적인 기준이 아니다. 예컨대 이사야가 내세우는 여호와 경외, 공의, 겸손, 성실 등 내면적인 가치로서 비가시적 원칙이며 내면적인 평화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평화의 통치 이념이 역사에서 구체화 되고 그 내용은 현실에서 실현돼야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비해 후자는 상당히 가시적이다. 자연계에 편만한 먹이사슬이라는 힘의 논리를 넘어 생명의 공존과 균형을 이루는 단계다. 예언자는 바빌론 포로기의 절망과 시련을 기원전 8세기로 투사하여 종말론적 환상으로 대치한 셈이다. 그리하여 사람 사이의 내적 평화가 이제 자연과 세상의 조화와 균형으로 확장되어 간다. 사람과 동물이 뒤섞여 사는 평화의 세상은 마치 태초의 에덴동산을 연상시킨다. 그 때 그곳에는(in illo tempore) 사람과 뱀 사이에(창 3:15), 사람과 모든 생물 사이에(창 9:2) 약간의 긴장과 적대감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사야 11장 6-9절에서는 둘 사이에 아무런 위협과 공포, 장벽과 편견이 없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나 상대를 제압해야 살 수 있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함께 공존하며 서로 나누는 대상이다. 사실 이사야보다 약간 앞선 동 시대 예언자 호세아는 창세기와 이사야의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 2:20)

이사야의 비현실적이며 원대한 평화의 꿈은 호세아를 통하여 들짐승의 야성을 길들이는 작업이 선행된 후에 가능한 것이었다. 들짐승과 자연계의 생물들이 더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언약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평화의 논리에 놀라운 진전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자연계가 더 이상 미지의 그리하여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의 파트너 또는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11장 6-9절의 묘사는 종말론적 구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평화의 세계가 공동체적, 전우주적으로 확장되는 장면이다. 이곳에서 메시야의 의로운 통치가 실현된다. 야생의 육식 생물과 길들여진 가축이 ‘어린 아이,’ ‘젖 먹는 아이,’ ‘젖 뗀 아이’ 등과 함께 평화로이 지내는 공간! 이 단계의 평화는 단순한 상호 공존을 넘어 상호 침투적이며 교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언자는 그곳을 바로 에덴동산이라고 보고 태초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묘사한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광야 시험을 보도하면서 에덴동산의 평화를 넘어선 우주적 평화를 구현한 것으로 보도한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 1:13).


진정한 평화는 세상을 지으신 이를 알고 그가 창조하신 의도를 파악하며 따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대 근동의 양대 제국이던 앗시리아와 바빌론은 엄청난 군사력을 앞세워 수차례 침략과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키는 패자의 위용을 보였다. 그러나 예언자에게 이상적인 왕이란 살상과 전쟁을 통한 제국의 건설이 그 목적이 아니었다. 곧 평화와 공존을 위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편만한 새로운 덕목을 제시한 것이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지식과 정보에 있지 않고 창조주로서 그분을 경외하고 그의 창조 섭리를 인식해야한다는 원칙의 선언이다. 이 점에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피조물과 창조주의 올바른 관계에 있어 본질적이다(9절). 따라서 이사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야말로 내면적인 평화는 물론 사람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사야 11장의 가시적 평화와 비가시적인 이원적 평화는 이론과 실제, 이상과 현실의 경계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채 있다. 평화의 이상적 묘사와 구체적 실현 사이에는 통과해야할 큰 관문이 있다. 마치 협연이 하나의 악보를 연주하듯 둘 사이에는 평화라는 공통의 악보가 주어진 셈이다. 예언자의 신탁과 신념으로서 평화의 청사진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평화로서 다음 단계의 구체적이 현실적인 실천이 요구된다.


. 평화의 건설: 미가 4장 1-5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미 4:3; 사 2:4)

미가의 평화 프로젝트는 이사야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전쟁 무기들을 폐기하거나 농사기구로 용도 변경하는 단계에 그치지 않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간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사야와 거의 일치된 문구가 들어있지만 미가의 본문이 약간 후대의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우선 미가 본문이 문체의 자연스러운 면과 시적 구성면에서 훨씬 더 균형적인 데다가, 4-5절의 결론부가 이사야의 본문보다 길고 진전된 신학 사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예언자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평화에 대한 염원이 전쟁 구호가 더 빈번하게 활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 인용들을 살펴보라.

너희 고관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사 21:5)
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예비하고 나가서 싸우라
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갈며 갑옷을 입으라 (렘 46:3-4; 51:11)

위 인용구들은 미가와 동시대 또는 후대의 상황이 포함되었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전쟁 준비와 전투를 진작하던 대표적인 구문들이다. 그 만큼 전쟁은 삶의 일부였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요엘의 선언으로 대표되는 ‘유사시’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과 태도 역시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
사방의 모든 민족들아, 너희는 모두 서둘러 오너라. 이 평원으로 모여라(욜 3:9-11 <새번역>).

   
 

농사기구인 ‘보습과 낫’을 살상무기 ‘칼과 창’으로 만들라는 전쟁 구호는 요엘 외에도 한두 군데에서 확인되고 있다(렘 46:4; 겔 39:9). 고대 이스라엘에서 전쟁은 그만큼 빈번한 일이었고 언제 발발할지 모르는 일에 대한 점검이나 대비는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예언자 미가가 일상에 가까운 전쟁과 전투 준비를 과감하게 뒤집어 평화를 선언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의 승리에 몰두해있던 당시 위정자들과 백성들에게 평화를 외침으로써 삶에 대한 근원적인 전환과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미가의 선포는 전쟁 구호를 평화의 담론으로 바꾸는 대담한 ‘반전의 수사’(reversing rhetoric)다.

조각가 부체티흐(Yevgeny Vuchetich)는 1959년 평화를 갈망하는 예언을 소재로 조각품을 만들어 유엔본부에 기증하였다. 작가는 한 손에 망치를 들고 긴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드는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 이 조각품은 미가의 전쟁 종식과 평화의 시대를 여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현재 뉴욕 유엔 본부 근처 평화공원에 세워져있다.

전쟁과 분쟁과 갈등을 상징하는 창과 칼을 부수고 쟁기와 낫을 만드는 과정은 평화의 완성된 단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무기를 폐기하고 훈련받은 군사들이 없다고 해서 사실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이 사라지거나 평화의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언자 미가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전쟁에서 평화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배웠다면(learning war) 이제는 토라를 통해서 새로운 교훈(learning Torah)을 깨닫고 배우라고 선포한다(신 5:1; 6:1).

예언자 미가의 종말론적 선언은 평화의 세상을 바라는 기획자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크고 작은 갈등과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기심과 악마적 품성이 꿈틀거린다. 사소한 분쟁과 이기심의 충돌은 이내 삶의 근간을 흔들고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며 사회적 혼란과 정서적 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니 미가의 평화 선언이 종말론적 통치에 대한 개혁이론 프로그램으로 간주돼서는 안 되고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과 파괴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악마적 요인에 대한 근본적인 경각심으로 읽어야하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미가의 선언은 이사야의 설계도보다 진전된 중간 단계의 평화로서 자발적인 의지와 자급적 실행 능력이 뒤따른다.

그렇다고 미가가 제시한 평화를 과도기적 단계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 단계는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제거하는 것으로 평가 절하할 수 없으며 평화를 위한 근본적인(radical) 변화, 곧 사상의 대전환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전쟁 무기를 폐기하여 생존에 필요한 농사기구로 바꾸는 것은 삶의 태도와 목표의 전면적인 수정이다. 평화는 자기 확장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과 공존과 균형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요구되기에 그렇다.

그런가 하면 시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전쟁 무기가 폐기처분되는 날을 꿈꾸며 평화를 위한 기도를 계속한다.

주는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창을 부러뜨리시며 활을 박살내시고 방패를 불사르신다 (시 46:9 <私譯>)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 하셨도다(시 76:2-3)

미가 역시 전쟁 종식을 위해 ‘여호와가 그날에 네 군마와 병거를 부수고 우상 숭배를 그치게 할’ 것을 확언하며(미 5:10-15) 평화의 근거가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건국대 교정에는 세계 도처에서 들여온 돌들이 줄지어 서있다. 비석에는 각 나라를 대표하는 격언이 현지 언어로 새겨져 있다. 예컨대 로마에서 온 돌비에는 요한일서 4장의 ‘Deus Caritas Est’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가 라틴어와 한글로 앞뒤에 쓰여 있다. 한편 히브리어로 새겨진 돌비를 찾았다면 그것은 역시 이스라엘이 보내온 것이다. 앞면에 미가 4장 2절이 히브리어로, 뒷면에는 한글로 새겨져 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2; 사 2:3).

전쟁 무기 칼과 창이 없는 곳, 즉 전쟁의 위협 대신에 필요한 것은 시온의 율법, 곧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예언자 미가의 신탁은 칼과 창이라는 전쟁 무기가 난무하는 세상이 아니라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하는 세상을 갈망하는 내용이다. 이 말씀은 포로기 예언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사 52:7)는 예언자의 신학과 맞닿는 지점이 된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통용되는 평화의 세상은 다음 장에서 심도있게 논의하게 된다. 평화의 높은 단계는 시편 72에서 흡인력과 팽창력으로 드러난다.


IV. 평화의 완성: 시편 72편

2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8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시편 72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는 왕의 통치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고 노래한다(2,7절). 이로 인해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구원을 얻으며, 왕은 세상의 선물과 진상품을 받는다(10-11절). 광야와 세상의 끝 다시스에서 와서 평화의 왕을 섬긴다. 이제 평화의 힘은 산꼭대기는 물론이며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게 되어 평강이 해와 달처럼 장구하게 될 것이다(15-17절). 이처럼 평화의 끄는 힘(cohesive attraction)은 사람들에게 온기를 주고 퍼지는 힘(expansibility)은 세상을 밝게 비추게 될 것이다.

시인의 평화는 우선 이사야 및 미가의 평화를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주의 판단과 주의 공의’(1절)는 이사야의 ‘공의로운 통치’(사 11:3-5)에 연결되고, ‘의인의 번영과 평화의 풍요가 달까지 이른다’는 미가의 ‘율법이 시온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는 예언과 맥이 서로 이어진다. 시인이 제시한 평화가 난데없이 뚝 떨어졌다기보다 오랜 시간 성숙되어 왔다는 뜻이다. 드디어 하나님의 평화로운 통치와 영향력이 세상에 두루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시편 72의 평화는 앞서 논의한 미가를 통하여 스가랴에서 다시 한 번 정제되고 숙성된 과정이 있었다. 포로 귀환 후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스가랴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10)

평화는 전쟁 무기를 제거하여 폐기장에 버렸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정의로운 재판으로 세워져야 한다. 한번 평화가 정착되면 멀고 가까운지 상관없이 그 영향력이 전달된다. 왜냐하면 샬롬은 독자적이며 자급자족적인 힘이 있으면서 동시에 결핍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샬롬은 존재적인 또는 상태적 의미와 함께 관계적 또는 질적인 의미의 온전한 모습을 갖춘다.

시편 72는 평화의 설계와 건축이 완성된 모습이다. 그곳에 ‘공의로 재판하고 정의로 다스릴’ 왕이 입주하여 백성들에게 평화를 베푼다. 시편 72의 평화는 두 가지 측면이 강조된다. 곧 평화의 흡인력과 팽창력이다. 시인에게 샬롬은 광야에서 사는 사람들, 원수들, 다시스와 섬들, 세상의 왕들과 민족을 끌어 모은다. 그들은 와서 굽히며, 심지어 흙을 ‘핥으며’(9절), 진상품과 예물을 ‘바치며 드리고’(10절), 그 앞에 ‘부복하며 섬긴다’(11절). 특히 ‘부복하고 섬기는’ 모습은 마치 절대 순종이라는 ‘무슬림’의 뜻처럼 평화 앞에 절대 순복하는 자세와 동작을 떠올린다. 평화의 흡인력은 자석의 끄는 힘과 다르다. 자석은 같은 성질의 철을 끌어당기지만 샬롬은 왕과 궁핍한 백성, 의인과 강포한 자 등 모든 생명 있는 자들은 물론 세상 끝에 사는 사람과 광야의 한미한 자들과 심지어 원수들마저 불러들인다.

그렇다고 평화가 자석처럼 끌어들이기만 하지 않는다. 왕의 통치가 왕궁에서 비롯되어 점차 외부로 확장되듯 공간적으로는 물론 시간적으로 퍼져나간다(8-11절). 시인이 두 차례 언급한 샬롬(3,7절)은 심지어 정치, 경제, 사회적 영역에서처럼 영적인 삶의 모든 시공간에 영향력을 미친다. 평화는 사람과 세상을 끌어들이며 또한 동시에 ‘판단력과 공의’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닿게 하고 우주 공간 ‘달’까지 이른다. 특히 시인이 신화적 개념, 예컨대 ‘바다, 강, 땅 끝’ 등을 들어 공간의 확장을 노래하고 또한 ‘다시스와 섬들, 스바와 시바’ 지정학적 상징들을 언급하여(10절) 평화의 팽창력이 세상 모든 공간에 두루 퍼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의 정의로 재판하며 주의 공의로 다스리자(2절) ‘산과 작은 산’에 평화가 넘친다(3절). 해당 본문은 정확히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언덕이 공의를 주리라’이다. 주님이 다스리는 공의의 통치와 평화는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이제 시인에게 평화가 미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이 없다. 시인은 샬롬을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금을 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양하는’ 단계에 다다른다(15절). 마침내 평화는 독자이며 자족적이고 결핍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평화는 이사야의 설계처럼 땅에서 비롯되거나 미가의 실천에서 보듯 인간의 구상과 실천 의지로 불가능하다. 구약에서 평화는 줄곧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즉 진정한 샬롬이란 배타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거나 그의 공의에 의해서 촉발된다. 특히 공의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이며 이사야 11장에서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평화의 설계도 중 가장 중요한 뼈대를 이룬다. 따라서 공의 또는 정의와 평화는 때려야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
흠 없는 사람을 따르며 정직한 사람을 눈여겨보라.
평화의 사람에게 미래가 열리리라(시 37:37 <私譯>)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사 48:18; 59:8)
한글성서에 일관성 없는 번역이 아쉽지만 평화, 평강, 화평 등은 모두 히브리어 샬롬의 번역이다. 구약에서 평화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물이다. 평화는 곧 개인에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공동체, 즉 이스라엘이 직접적인 수혜자가 된다.

여호와는 그 얼굴은 내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6)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주리니(사 66:12; 26:12)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평강을 그의 백성에게 주시고(대상 23:25)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다시 말해 평화의 주체(host)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새찬송가 410> “내 맘에 한 노래 있어”는 놀랍게도 평화가 하늘에서 온다고 노래한다. 시카고에서 활동한 찬양 사역자 빌혼(Peter P. Bilhorn, 1865-1936)이 가사와 리듬을 입혔다. 다음은 후렴의 영문과 한글가사의 비교다.

   
 

특히 한글로 번역된 가사를 보면 평화가 운율 때문에 세 차례만 언급되고 있지만 본래는 모두 다섯 번이나 나온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평화를 하늘로부터 온 것(from above)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로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평화에 대한 신학적 진술로서(욥 25:2)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듯 노래한다.

한편 포로기 예언자 나훔과 이사야에게 평화는 ‘아름다운 소식’이 되고 구원이 되어 온 누리에 전파된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나 1:15).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사 52:7).

평화의 마지막 단계는 평강의 왕에게 절대적으로 순복한다. 따라서 그가 정의와 공의로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7절) 다스릴 때 먼 나라의 왕들이 진상품을 바치며 여기저기 가까운 곳의 왕들이 예물을 드릴 것이다. 마치 절대자에게 복종하듯 평화의 왕을 따른다. 따라서 샬롬은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시 85:10 <공동번역>) 여호와의 통치가 종말론적으로 실현되는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게 된다.

평화는 마치 뛰어난 건축가의 이상과 원칙을 반영한 설계도를 따라 기둥을 세우고 용마루를 얹어 완성한 건물에서 풍기는 품격과 같다. 사람들은 위대한 건축을 보려고 여기저기서 찾아오고 건물의 아름다운 위용과 명성은 풍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여기에 평화의 왕처럼 집 주인의 겸손하고 인자한 인품은 내부로 강화되고 건물의 빼어난 풍광은 외부로 확장력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하늘에서 주시는 평화는 열방을 끌어당기는 흡인력과 함께 세상으로 확장되는 팽창력이 마치 협연처럼 울린다.

V. 맺는 말

영어 the Architect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잠언 저자는 하나님을 건축 장인이라고 서술한다(잠 8:30). 하나님은 우주를 설계하고 세상을 창조하신 뛰어난 건축가라는 뜻이다. 마치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브살렐의 건축과 오홀리압의 기술로 성막이 완공되었듯,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평화의 설계와 건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 것이다.

평화를 위해 하나님은 1) ‘터무니’를 스케치하고 설계도를 그린다(사 11장), 2) 설계도에 함축된 건축가의 철학과 정신을 최대한 살려낸다(미가 4장), 3) 완공된 (평화의) 세상에 왕이 입주하자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기뻐하며 그 명성은 우주 끝까지 전파된다(시 72). 하나님은 평화의 건축가시다. 평화는 창조주 하나님이 성취하신 창조의 걸작이다. 이사야 11장의 평화가 독자적이라면, 미가 4장의 평화는 독자적, 자급자족적 단계에 해당하고, 시편 72의 평화는 독자적, 자급자족적, 온전하고 풍요로운 상태다.

마침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사람들이 샬롬을 부르짖고 열망하지만 예레미야의 한탄처럼 현실에서 평화를 찾기는 어렵다(렘 6:14). 현 단계의 평화조성은 구약이 제시한 ‘터무니,’ 곧 낮은 단계의 평화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지금은 칼과 창을 벼려서 쟁기와 낫으로 만드는 실천이 강력히 요구되는 중간 단계다. 미가는 평화가 개인의 열망과 의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기대라고 충고한다. 평화는 ‘여호와의 열심’에서 비롯되어 ‘정의와 공의’를 통하여 실현된다(사 9:7). 그런 다음 하나님이 주시는 ‘결핍 없는’ 단계에 이르면 평화의 흡인력과 팽창력은 저절로 곳곳에 전해진다. 곧 세상이 평화 앞에 ‘부복하며 섬기고’ ‘샬롬의 풍성함이 달’에 도달할 것이다. 그의 통치에 드러난 평화는 세상 끝까지 외연이 확장되고 다른 한편으로 내면화되고 강화된 샬롬의 온전한 세상을 이룩할 것이다.

구약에서 샬롬을 이해할 때 해당 본문의 언어적 표현보다 저자의 의지적이고 실천적 측면을 인식해야한다. 평화는 교환적 척도로 치환할 수 없는 질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정치적 제안과 현실적 이론들이 어지럽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 어떻게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무엇을 구체적으로 내놓을 수 있을까?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이 때 한반도의 구성원으로서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절실하다. 무엇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자급자족적으로 실행하며, 언제 결핍 없는 상태에 이를지 평화의 로드맵을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예컨대 ‘평화를 위한 세금’와 같은 공동의 목표를 세운다면 그 힘이 안으로는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이뤄내고, 밖으로는 동북아 넘어 세상 끝까지 퍼져나갈 평화의 아름다운 협연을 이끌어낼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 - 시편 37:37

한신대 구약학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김창주 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블로그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포토뉴스
인물 

이은태 목사 “하나님이 함께 하면 능치 못할 일 없다”

이은태 목사 “하나님이 함께 하면 능치 못할 일 없다”
“With God nothing is impossible”뉴질랜드...
해설
최근인기기사
1
한국작곡가회 초청 시인 소강석 작곡 콘서트
2
한기총 임시총회 전까지 통합 추진 계속할 것
3
호주 시드니선한이웃교회, 김철영 목사 초청 전도집회
4
[김명환 목사] 십자가 신앙 통해 부활의 신앙 회복하자
5
[원종문 목사]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 되라
6
“서울동남노회 사고노회 지정, 세습 옹호 행태” 비판
7
[김승자 목사] 너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라
8
[김고현 목사] 마음에 사랑과 인정의 곡식을 심자
9
[임성택 목사] 위선과 가장 앞에 선 두려움!
10
[김재성 교수] 루터 오백주년과 종교개혁의 재발견 (68)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기독교한국신문  |  등록번호: 서울, 아04238  |  등록일자: 2016년 11월 23일  |  제호: 기독교한국신문
발행인: 유달상  |  편집인: 유달상  |  청소년보호책임자: 유달상
발행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순라길 54-1, 3층(인의동)  |  발행일자:   |  02)817-6002, 02)3675-6113 FAX 02)3675-6115
Copyright © 2011 기독교한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ck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