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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임성택 목사] 평화는 회복을 위한 생명력이다.
임성택 목사  |  webmaster@c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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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24  09:5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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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택 목사.

서 론

인간은 도덕성을 가짐으로 다른 존재들과 구별된다. 이 도덕성은 단순히 본성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생래적인 의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래적인 도덕의식이 완전한 의미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도덕성에 ‘종교적 차원’이 부여되어야만 한다. 이른바 이 종교적 차원의 의식은 신전의식(神前意識)으로서, 모든 인간의 보편적 도덕성 위에 부과되는 특유한 성품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인간에게 작용하는 보편적인 의식작용이다. 여기서 종교적 차원이라 함은 궁극적인 관심에 의해서 포착된 절대성을 말한다. 물론 이 때의 종교적 차원의 도덕성이 반드시 기독교 차원을 의미하는 것일 수는 없지만, 논의를 위하여 그 범위를 기독교 윤리로 한정하고자 한다.

고래적(古來的)으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학자들에게 비판되어온 바, 독선적 교리와 신앙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다른 종교 혹은 사상과의 타협은 사실상 어려운 유일신앙의 종교로 알려졌다. 이러한 주장을 부인하거나 변명할 뜻이 없으며 이를 사실로 시인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직선적이고 단선적인 기독교 인식은 기독교의 내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전통적인 기독교가 복음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지나친 국수적 경향과 반 기독교도들에게 기독교 진리체계를 바르게 언표(言表)할 방법을 찾지 못함으로서,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기독교 진리체계의 왜곡을 가져오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본고는 현실적인 모든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접촉점을 기독교 윤리적 차원의 평화론에서 찾고자 하는 바, 그 이전에 기독교를 전능한 힘의 종교로, 무차별적인 무한 사랑의 종교로, 사전적 의미의 정의의 종교로 이해된 것은 일반인들의 단순한 해석이 가져온 그릇된 것임을 집고 넘어가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 동시에 저주와 파멸의 종교이며, 구원의 종교인 동시에 심판의 종교이다. 세속에 무관심하면서 철저하게 세속과 관계하고 있으며, 초월적 계시 의존적인 비합리성을 갖지만, 사물해석(事物解釋)은 하나님의 해석을 유비(喩比)하는 합리적 해석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초월을 지향(指向)하지만 그 초월은 반드시 내재를 포괄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기독교 평화를 논하는 논의의 기초이다.

이러한 평화론에 대한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설명은 쉬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견고한 통일 구조, 즉 대립하면서도 포괄하는 이 기독교 평화의 구조적 특성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해명할 수 있다고 하면 이는 기독교의 유일성 속에 존재하는 포괄성을 다양하게 드러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궁극에는 이 다양성의 포괄성을 기독교의 유일성으로 반증할 수 있는 역설적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일반적인 통념적 요구로 형성된 왜곡된 재래적 신학의 기독교 이해에서 벗어나 기독교 계시의 궁극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과 힘과 정의라는 개념을 단초로 이 세 개념의 균형과 조화를 존재론적으로 규명하여 기독교의 본질적인 윤리구조로 현상(現象)시키고자 한다. 삼위의 하나님을 성부-정의, 성자-사랑, 성령-힘으로 설명하는 것은 교리사적으로 이미 검증된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현상(現象)된 기독교의 적용과정을 윤리화라고 정의한다면 이 윤리화 작업을 통하여 얻어낸 균형과 조화로서의 평화의 개념을 신학, 철학, 과학(물리학)은 물론 현실적 문제까지도 포괄하는 모든 존재일반들과의 접촉점(接觸點)으로서의 개념으로까지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각 개념에 대하여 가능한 순수개념의 차원에서 접근을 시도해 보자.

사랑과 힘과 정의의 유기적 관계의 가능성

1) 사랑

사랑의 근본 형식은 대략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이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과 관계된 것이다.

첫째 사랑은 도식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무규정성(無規定性)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사랑은 여러 성질과 여러 보편(普遍)을 통하여 다양하게 묘사될 뿐, 어떤 의도나 요구가 아니라 주체자(主體者)의 자발적인 정서요 자유롭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정서이다. 따라서 사랑은 다양한 장소 여건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날 뿐 특정하게 규정되어 해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둘째 존재론적인 사랑이다. 사랑이 정서적인 것이 분명하다고 할 때 그 사랑은 마음의 한 영역 내에 존재하는 확실한 개념일 것이다. 스피노자는 사랑을 인간에게 있는 다른 정열들 중의 하나로서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간주하고, 동시에 신이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신을 향하여 간직해야 할 지적 사랑이라고 한 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그는 사랑을 단순히 정서적인 영역에서 존재론적 영역에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셋째 사랑을 정서적인 것도, 존재론적인 것도 아니며 윤리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유태교, 기독교 등에 나타나는 표현 중에 ‘너는 ....하여야만 한다’ 라는 율법적 명령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된 사랑이 과연 대표적 타율(他律)인 신율(神律)로서 요구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또 그러한 요구에 부응한 사랑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 성질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정서는 강제될 수 없다. 강제된 종교적 거짓 회개, 강제로 촉구된 거짓 사랑 등이 가지는 파멸적인 결과는 결코 사랑이 명령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을 신율(神律)로 파악할 때, 사랑을 정서나 존재론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며 오직 윤리적일 뿐이다.


2) 힘

힘은 사회학적 범주의 용어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힘의 개념은 단순히 사회학적 범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즉 물리학이 물질세계의 근본구조를 설명할 때 힘이라는 용어를 주요한 개념의 하나로 사용하는 빼놓을 수 없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제기되는 개념적 문제는 사회학적인 범주에서 발생한 힘의 개념이 어떻게 물리학의 범주까지 확장되어 공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회학적인 세계의 구조와 물리학적인 세계의 구조 사이의 어떤 동질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먼저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힘의 양태를 고찰하자. 사회적인 힘은 정당한 힘과 폭력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사실 이 구분 역시 애매하다. 이중성을 갖는 힘의 정당성과 폭력성은 거의 배타적으로 인간의 생활영역을 제약하고 있다. 그 예로 가장 우리 현실에서 접하기 쉬운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부당성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어떠한 정치형태이든 정치권력은 정당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권력이 수반되지 않는 정치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와 권력은 하나요 동일한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나 독재주의에서나 권력없는 정치란 있을 수 없으며 이때의 정치권력이란 곧 힘이요 이 힘은 사회적인 힘이다.

그런데 이때 정치권력이 부당한 권력으로 나타날 때 즉 사랑과 정의에서 유리되어 나타날 때 이것이 곧 폭력이며 이것이 곧 힘의 부당한 강제성이다. 물론 이 강제성의 문제는 힘의 작용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데, 이는 그 강제성이 물리적인, 심리적인 수단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힘의 강제성이 정의와 사랑을 상실한다면 그때의 힘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힘의 강제성을 대표하는 것은 정신적인-영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이 힘은 강제를 전혀 생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힘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궁극적인 강제이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 정신적인 힘이 어떻게 물리적인 힘으로 유희하며 작용하느냐하는 문제의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앞서 논구한 것처럼 힘의 보편적인 강제성을 공통적인 접촉점으로 파악한다. 물리학에서의 힘의 개념을 말할 때는 역시 움직이고 움직여지는,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운동, 곧 강제성이다. 물리적 작용이든 화학적 작용이든 모든 반응은 타의의 강제에 의한 자의의 대응이다. 바로 여기에서 힘의 사회적 범주와 물리적 범주를 연결하는 접촉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다방면의 힘의 접촉점의 문제들을 해명하기 위해서 접근해야하는 것은 오직 힘의 근본 의미를 발견함으로서 해명 가능한 것들이며 이것의 유일한 길이란 힘의 존재론적 근거에 대해 묻는 방법이다. 힘을 존재론적 근거로 파고들어 가는 일만이 힘과 강제력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애매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3) 정의

정의의 개념만큼 많이 각 분야에서 논의된 것도 없지만 아직도 어느 분야에서도 이 개념이 정확하게 정립된 곳은 없이 각 분야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즉 법률적 정의(legal justice) 도덕적 정의(moral righteousness)는 모순관계로 파악되며, 법률적, 윤리적 의미의 정의는 종교적 정의(religious justification)와도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정의의 개념 역시 힘이 다방면에서 작용하며 서로 공통의 접촉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정의도 다방면에서 그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며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을 인용하고자 하는데 이는 그의 언급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존재론적인 해명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분배적 정의(分配的 正義)와 시정적 정의(是正的 正義)로 구분하였다. 분배적 정의란 어떤 사람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주어진 정당한 분깃이며 그 사회적 신분은 부분적으로는 선천적이며 부분적으로는 자기의지인 것이다. 시정적 정의란 그가 자기신분의 잠재력, 즉 선천적이며 자기능력으로 획득한 신분을 적절하고 합법 타당하게 실현시키지 못한데서 오는 권리와 주장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결과는 형벌로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정의에 대한 형벌의 의미와 형벌의 관계가 문제로 발생한다. 즉 형벌은 반드시 시정적 정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그리고 형벌 그 자체에는 무슨 목적이 있으며 그 형벌은 반드시 정의를 확립시킨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형벌은 항상 분배적 정의에 대하여는 부정적인가 하는 문제들이 발생한다. 논자는 이 질문에 대하여 명쾌하게 그러하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은 정의가 사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필연적이라고 할 수 없으나 정의란 인간의 상호관계를 조절하는 사회질서의 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을 따르면 정의는 개인의 덕성(德性)이요 사회적 윤리이다. 이때의 덕성은 그 개인의 행동이 옳다고 여긴 사회질서 곧 당대의 윤리에 일치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답으로의 접근이 가능한 것 역시 사회적으로 드러난 정의의 현상을 살피기 이전에 그 개념의 저변을 흐르고 있는 정의의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함으로서만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이 세 개념 중 어느 하나도 그 근본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분석하지 않고는 그것이 가진 여러 가지의 의미를 바르게 정의할 수도 묘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앞의 논의에서 힘의 존재론적 구조의 정당성은 확보하였다고 전제할 때 바로 이 세 개념이 어떻게 구조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접근하여 가는 것이 논의의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여기서 세 개념의 유기적 관계성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

사랑, 힘, 정의의 유기적 삼각구조

1) 사랑과 힘

계속된 논의 속에 이 세 개념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미묘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서두에서부터 논의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랑과 힘의 관계를 구조적으로 정의하게 되면 사랑이란 힘의 단념(resignation of power)이요, 힘은 사랑의 부정(denial of love)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정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악은 사랑이 정서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힘이 강제적인 측면에서 이해된다면 이 견해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병행되고 있다. 즉 이러한 해석은 틀린 해석이라기보다는 그 의미를 단선적으로 사고하게 함으로서 중요한 관점에서 결정적인 혼동을 초래하는 결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을 노골적으로 거부한 권력의지(will to power)의 철학자 니이체의 해석에서 이러한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전통적인 신학자들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을 빙자하여 니이체의 권력의지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도 힘의 다른 측면을 무시한 채, 힘과 사회적인 강제력을 동일시하는데서 생기는 잘못이다. 위의 두 경우가 모두 사랑의 존재론을 결여하고 있음으로 발생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힘이 마주침에서 생기는 사회윤리의 문제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힘이 단순히 불신으로 보이고 사랑이 감정적 성질로 대치되어 이해되는 한 건전한 사회윤리는 형성될 수 없다. 우리가 힘의 구조 속에 사랑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힘의 요소를 무시한 사랑은 결국 무질서한 양보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건설적인 사회윤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과 힘의 존재론적 분석이다.

2) 사랑과 정의

여기서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 사랑과 힘을 대조시키듯이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과 정의를 대조시키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정의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의란 법적으로 어떤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당한 요구대로 그 몫을 분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사랑은 그들 중 한 사람을 설득시켜 그 권리를 선의적(善意的) 의미에서 타인에게 양도하게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이러한 설득에 의해 권리를 양도한 그 사람은 정의의 개념에서가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요구된 행위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을 파악하면 사랑은 정의를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권리를 단념하는 행위자체가 어떤 측면에서는 정당한 분배의 정의와 그 질서를 무시한 경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예로서 세익스피어의 작품 리어왕의 첫 장에서 리어왕이 모든 권리를 그 딸들에게 양도하는 때와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책임하고 공정치 못한 도피적인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그 본질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온 일이 없이 정의에다가 사랑이 무엇인가를 부가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나는 당신의 범죄 행위를 알고 있소, 그리고 정의의 요청에 따라 당신을 재판에 회부해야 되겠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당신을 그냥 보내는 것이오.”라고 했을 때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대단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위장된 거짓 사랑의 관대성에 불과하다. 이것의 결과는 범죄한 사람에게 위장된 현실을 얻게 만들어 사랑도 정의도 얻을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정당하고 공정하게 행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행위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중세신학에서 사랑과 정의의 관계가 위의 문제처럼 벌어지는 긴장은 캔터베리의 안젤름(Alselm of Canterbury)에 의해서 제정된 구속론(救贖論)을 통하여 상징화되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은 인간의 범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의 자비로운 사랑과 모순되는 그의 시정적 정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을 먼저 찾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을 위해 제시된 시정적 정의의 법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온 인류를 영원히 죽이는 원인이 되었다.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시정적 정의의 법이 인간 스스로에게 굴레가 되는 한 그 시정적 정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적 권위로 인하여 인간은 필연적인 죽음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심각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의한 십자가의 처형으로 해결을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모든 죄에 대하여 생명의 대속(代贖)을 추구하는 시정적 정의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파멸의 위기에 몰려 있던 인간에 대하여 구원의 길을 성취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이론은 존재론적 입장과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 통찰을 잘 설명해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통찰이란 궁극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위해 정의를 만족시켜야만 한다는 사실이요, 정의는 영원한 파괴적인 결과를 막기 위하여 사랑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정의와 힘

정의화 힘의 관계에 직면하여 정의에 대한 법과 질서의 관계, 그리고 힘에 대한 법과 질서의 관계를 논의할 때 그 관계들 사이에서 오는 혼동 역시 작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생기는 첫째 문제는 정의가 법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라는 통념을 따른다면 그러면 이 법을 주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법을 준다는 것은 근본적인 힘의 의지표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것의 근거가 된다는 뜻이며 이는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근거로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힘을 가진 어떤 집단이 그 힘을 근거로 여러가지 법을 부여한다면 그 때 그 법들은 정의와 어떻게 관계 지어질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때에 말하는 법은 단순히 어느 집단이 가진 권력의지의 표현은 아니다. 국가론에서 법률은 사회통치권을 지배계급에게 주는 도구라고 해석한다. 이때의 지배계급의 권리란 군사적 침략이 될 수 있고 사회 경제적 성층이 될 수도 있다. 이 둘의 경우에 정의가 실현되려면 나라가 쇠망하고 정치적 권력의 작용이 없는 어떤 정부에 의해 대치되는 경우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계급이 말하는 정의는 불의요 기껏 옹호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관념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론을 보다 더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정의를 하나의 완전히 권리의 기능으로 해석하고 절대로 권력을 재판관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를 분석하고 수긍하고 정의를 완전한 권력기능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정의의 반응하는 궁극적 원리로 등장한 하나의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정의를 권력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동시에 정의 자체를 완전히 하나의 타당한 판단으로 확립시키는 시도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정의는 절대적인 것이요, 권력 구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으로 자연법 혹은 법리(法理)에서 나온 실정법의 실천을 추구한다. 힘과는 관계없이 실정법은 그의 본질적인 타당성을 바탕으로 복종을 명령하고 요구한다. 실정법은 힘으로는 나타나지 않으나 힘을 판단하고 규제한다.

사랑과 힘과 정의의 유기체로서의 평화

보편적으로 사랑의 신, 사랑하는 자(being love)로서의 신을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인간에 의해 파악된 신적 사랑의 모습은 본래의 신적 사랑에서 심각히 변형되어 있음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사랑의 개념이 신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신적 사랑의 근거는 보다 높은 존재자가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그 무한히 초월적이고 본질적인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그 사랑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를 떠난 인간의 사랑은 무가치한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사랑의 행위가 신의 사랑에 유비된 것이 아닐 때 그것은 이미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무가치한 사랑일 뿐이다.

또한 신적인 힘을 설명할 때 그 힘 역시 상징적인 의미로 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이때의 신의 힘을 신의 전능성(全能性)이라고 언표(言表)한다. 이 신의 전능성의 근본 의미는 모든 개개의 특수한 힘을 무한히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창조적인 힘의 바탕으로서 나타나며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있는 존재의 힘이라는 뜻이다. 종교적인 경험 속에 있는 신의 힘은 어떠한 다른 힘에 의해서도 정복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용어를 쓴다면 비유(非有)에 대한 무한한 저항이며 영원한 승리이다. 그러므로 신적인 정의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우리는 신을 의로운 재판관으로 상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신적인 법은 인간의 정신 구조를 포함하고 있는 존재의 구조요 그 존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포괄적인 구조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신적인 법은 자연법이요 부단한 창조의 법칙이며 만물 속에 있는 존재의 정의이며 동시에 실정법이다. 이 실정법은 신 이외의 어떠한 구조에도 의존하지 않는 신의 자유 속에서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이 정의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 위치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신적인 법이 자연법인 한에 있어서만 자연과 인류에게 있는 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연역적으로 명시할 수 있다. 또한 신적인 법이 실정법인 한에 있어서 우리는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귀납적으로 관찰할 수밖에 없다. 이 양 측면 모두 만물 속에 있는 정의에 대한 신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세 개념을 신적 요소와 관계되어 우리의 삶 속에 상징적으로 언표(言表)된 신의 궁극적인 형상으로 보는 것은 세 개념이 궁극적인 통일체로 되어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통일체는 결합체와 다르다. 우리가 결합을 말할 때는 언제든지 여건과 상황의 변화에 의해 분리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실제로 분리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러나 통일체의 개념은 일관성 있는 조직의 유기성(有機性)으로 인해 분리할 수 없다.

즉 나무에게 있어서 뿌리와 줄기 그리고 잎은 유기적 통일체로서 분리 그 자체는 개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개념을 신에게 상징적으로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사랑가 힘 사이에 하나의 긴장이 나타나는 데 이것은 신이 어떻게 본질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실현하면서 자신의 전능성을 구현하는가하는 문제이다. 어떻게 그러한 모순을 허용할 수 있는가? 이는 어쩌면 신은 충분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든지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든지 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론적으로 형식화한다는 일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신이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죄가 있을 수 없는 세계를 만들었다면 피조물들은 재결합시키는 사랑의 경험을 통하여 전제되는 신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긴장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사랑은 존재의 힘이 무질서한 양보가 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정의에 의하여 분명하게 규정된다. 동시에 이 사랑은 그 본래적인 작용으로서 사랑을 거역하는 것에 대하여 용서를 통하여 구원하는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랑의 두 작용이 어떻게 조화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 역시 안제름의 속죄론(贖罪論)과 유사하게 신의 사랑이 인간에 대하여 의인화(擬人化)됨으로서 성취되었다. 즉 신적 정의에 의해 구성된 인간의 범죄는 성육신(成肉身)한 신의 대속 처형(代贖 處刑)으로 성취됨으로 신의 정의는 확보되고 사랑은 거역하는 인간에게 그 속죄자의 의를 전가함으로서 이를 완벽하게 실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두 작용이 하나의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이유가 원래의 신의 의지이며 동일한 신 인격으로부터 유출된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결코 구원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사랑이 구원을 강요한다면 이때의 신의 구원계획은 이중 정의를 승인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중심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는 자유로운 책임적인 자아로서 인간의 인격적 요구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신은 사랑이요 신의 사랑은 그 힘과 하나이기 때문에 신은 그 누구도 강제로 그의 구원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일을 한다면 신은 그 자신과의 불일치를 초래할 것이므로 신은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다. 이러한 행위는 사랑의 무제약적 특성(無制約的 特性)과 신의 주권을 파괴하는 처사가 된다. 사랑은 사랑을 거역하는 것을 파괴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랑을 거역하는 요소를 가진 사람을 파멸시켜서는 안된다.

한반도의 유기적인 평화 가능성

1)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각축장

지금 이 논구는 통일 한국을 바라보는 교회의 시선을 어떻게 정향시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과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에 관한 이론적 논구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대륙진출을 의욕하는 해양세력과 해양진출을 갈망하는 대륙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위기와 전쟁은 언제나 힘과 사랑과 정의의 존재론적 유기성을 상실한 왜곡된 사랑과 위선적 정의의 가면을 쓴 힘이 서로 엇물리면서 더 강력한 흡인력을 구사하는 나라의 힘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정치외교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반도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무엇보다 집중적으로 추구하고 강제하여야 하는 것이 지금 정치가들에게서 사랑과 정의와 힘의 유기적 리더쉽이 발휘되도록 하는 일이다. 여기서 교회 정치가들의 경우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지금 한반도의 정세와 전망이 밝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이 세 요소의 불균형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지금 정치권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가계 각층의 핵심적인 키 워드가 ‘소통’이다. 그런데 이 소통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논해왔던 유기체로서의 평화의 사회화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소통은 유기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 일방적 전달은 고지(告知)일뿐 평화적 교류를 파괴하는, 즉 유기체의 관계에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는 운명적으로 얽혀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한반도의 평화 여부는 그 나라의 국익과 직결되어 있고 그것에 따라 그들의 정책이 움직이므로 정의롭지 못하다. 더불어 그 국익에 배치되면 전통 우방이든 혈맹이든 그런 것들에 상관하지 않는 일련의 결정들은 결코 예사로운 일들이 아니다. 나아가 그들의 이익의 결정은 힘의 우위에 있다고 보고 그 경쟁의 정도가 지나치다. 이 모든 것들이 한반도의 정세를 악화시키고 평화의 영구적 정착을 위험하게 한다.

2) 유기적 평화지대로서의 한반도

판문점이 국제적으로 좋게 평가받는 것은 일촉즉발의 위협을 안고 있는 지역의 경계선에서 안정적인 평화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분쟁지역에서 물리적 안전을 획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완충지역을 설정하는 일이다. 가장 극심한 분쟁지역을 가장 안전한 완충지역으로 설정하는 것은 최고의 역설이 될 것이나, 이는 한반도를 포기할 수 없는 각축 세력들의 충분한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일방의 한반도 위력적 지배는 다른 일방들의 도전과 견제를 받게 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한반도를 분쟁의 위험으로 내몰고 만다.

한때 한반도의 영세중립국화를 위한 의견이 국제사회에 진술된 바 있지만,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는 가장 좋은 대안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자기 영향아래 두려는 각축세력의 이해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으로는 어느 한편에 기울지 않는 영세중립화를 통해 내부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한다면, 즉 군대는 보유하되 침략은 하지 않는 나라는 가장 안전한 자구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동아시아는 새로운 질서의 재편을 위해 모두가 몸부림치고 있다. 특별히 북한의 움직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지금의 북한이 과거의 정권과는 분명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그들이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인지 아니면 여전히 정권의 유지와 고립화를 지속하려는 전술인지는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확실히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런 북한이 지금 국제사회에 던지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분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이와 더불어 남한은 지금까지의 동맹과 대결 구도에 집착하지 말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로서 한반도의 영세 중립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하여야 한다.

3) 한반도의 유기적 평화를 위한 방법

결국 핵심은 한반도의 평화이며, 통일은 평화의 실현이요 한반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오고오는 세대에 물려줄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 통일로 획득한 평화는 회복을 위한 생명력이다. 영세 중립국을 향한 국제사회의 노력이 전개된다면, 관련국들은 진정한 사랑과 힘과 정의의 균형을 유지하는 평화지대를 세워나가야 한다. 과연 이를 위한 관련국 정치가들의 사상적 인식이 일치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 역할의 가능성은 첫째 평화의 개념들에 대한 본질적인 일치, 둘째 평화의 개념들의 실천에 대한 자유, 셋째 실천 방법의 자유로 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이해와 협력, 이것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핵문제에 관하여 해양세력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소위 “최고의 제제와 압박”을 통한 완전하고도 불가역적인 북핵 폐기를 추진하고 있고, 이에 대륙세력은 저항하고 있으며 남북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듯 보이나 지극히 위험한 양상이며 언제 원점으로 되돌아와 서로를 다시 군사력으로 위협하는 것을 반복할지 모른다. 여기에서 관련 국가들은 하나의 본질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그것은 ‘영구적인 한반도 평화’여야 한다. 지금 모든 관련국들의 입장이 비록 자국이익이라고 할지라도 전쟁상태가 아닌 평화상태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대 원칙에 합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각국의 동아시아 외교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

이런 한반도의 평화유지라는 본질을 구현함으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각국의 노력은 보장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이 새로운 평화질서를 재편해 가는 데 있어 과거 냉전시대의 흑백논리나 이념적 진영논리가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에 어울리는 모양이 아니며, 자국 이익의 추구라고 하는 현대 외교의 패턴이며 이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을 비방하거나 방해해서는 안된다. 혈맹으로 지킨 나라와 그 혈맹의 당사국을 잊지 않고 감사하되, 그것에 집착함으로 현실의 안전을 위협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우리를 포함은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자유로운 외교전에서 밀리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각국들의 이런 노력에 의해 각국의 국민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방의 국익을 위하여 다른 일방들의 국민들을 힘들게 해서는 안되며, 자국민의 행복을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그 외교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관련국 국민들이 모두 공유하는 행복이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를 위하여서 서로의 나눔과 배려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가치 공유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일방의 강력한 압박이 과연 한반도 평화유지에 도움이 될지를 고민해야 한다.

즉 한반도 평화유지라는 본질에서의 일치, 각국의 이익을 위한 자유로운 외교, 자국의 이익에 앞서 모든 관련국가 국민들의 행복을 위한 서로의 양해가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의 축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평화는 한반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회복의 생명력이 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개인과 각국과 각 세력들의 합의와 협력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지, 강제된 힘과 그 힘에 굴복하는 형태로서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상태가 위험한 이유이다.

평화는 사랑과 힘과 정의의 균형과 유지에서 온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이며 이는 개인적으로부터 집단, 국가, 국제관계에서도 새로운 질서유지와 지구촌 형성의 이념적 토대가 되어야 한다. 논자는 이 개념을 신적 삼위일체의 존재방식을 따라 셋임과 동시에 하나인 신적 통일체로 현상되어 존재한다고 보고 평화의 개념적 논술을 전개해 왔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적 통일체로서의 세 개념에서 제시되는 평화를 향한 모든 윤리적 명령은 그 기본적 성격으로 인해 신적 권위를 갖는다. 이는 인간의 존재와 인식은 신적 존재와 인식에 유비적이라는 뜻이며, 결국 평화의 정당성은 여기에서 확보된다.

6. 결론

이런 평화의 윤리는 인간 공동체에 명령 형태로 제시되었다. 여기서 공동체란 평화를 이루고 유지할 책무를 지고 있는 삶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이 공동체는 자아 중심의 모호한 독립성 및 폐쇄성을 극복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면서, 동시에 힘의 강제력을 포기토록 함으로서 힘의 강력한 실현의 모호성 또한 넘어서도록 서로를 고취하도록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한다. 또한 독립성과 폐쇄성을 극복하면서도 자유로운 활동의 보장과 이익추구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이고 타산적인 이익이 아니라 모두가 그 이익을 공유하도록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도록 정의를 고취한다.

바로 이러한 윤리적 방법은 인간의 어떠한 사랑의 윤리도 힘과 정의의 지지를 얻어야 하며 힘은 사랑과 정의, 그리고 정의는 힘과 사랑을 확보하여야만 하므로 그들은 존재론적으로 일치한다. 이 일치 속에서 개체는 동시에 철저히 독립적이다. 사랑과 힘과 정의는 자신에게 무엇보다도 충실하다. 실상 인간 삶의 모든 개체는 철저히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다. 비록 그들은 동시에 포괄되고 포괄하는 존재론적 일치를 이루고 있어도 개체의 자유는 제한 받지 아니한다. 이것이 삼위의 인격성이다. 그러므로 신적인 기독교 윤리의 도덕적 명령은 당연히 인간과 만물 행동의 자유를 선언해야 하며 그 자유는 포괄적, 존재론적 일치의 행동원리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개체의 자유로운 행동의 원리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은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단호히 없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신적 삼위일체가 그 자유로운 행동 속에서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삼위의 본질적인 일치 속에서만 나타나는 개체간의 헌신적인 신적 사랑 때문이다. 삼위의 사랑의 관계는 모든 우주의 사랑의 근거로써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분리될 수 없는 필연이다. 이 사랑의 관계에 유비(喩比)된 세 개념 역시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요, 이 개념을 연결하는 것은 개체 요소간의 신적 사랑에 유비(喩比)된 사랑이다. 기독교 사랑은 본질적으로 여기서 현상된다.

여기서 서두에서 의도하였던 목적을 해결하고자 한다. 만물이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사랑의 본질적 근거를 이탈하여 대립하는 그 투쟁의 근거는 신적 통일성으로서의 사랑처럼 세 개념의 존재론적 일치의 통일을 위한 사랑과 힘과 정의의 사랑의 관계가 현저히 왜곡된 것이다. 거기서는 존재론적 일치는 이미 붕괴되었으며, 개체의 행동자유는 독선이 되고 동시에 이들을 결합해야할 사랑은 이미 그 존재론적 일치의 실패로 더 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기적인 분열과 대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본질적이고 존재론적 일치를 추구해야 하며 자유의 행동원리를 제시해야 한다. 그 가운데서 사랑은 서로를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일방은 다른 일방들에 대하여 과감하게 문을 열어야 하는 외교적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 윤리의 명령을 수행하는 공동체가 이 세 개념의 존재론적 구조를 수납함으로 그들의 존재가 긍정되는 한편 이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모호한 실재는 다시 이 질서 속에 합류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일으키도록 고취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평화의 개념은 재이해 되어야 한다. 모든 개념과 주장의 대립을 극복한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가장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기독교 윤리의 생명력이며, 천부적인 인간의 행복과 가치 실현은 여기서 가능할 것이다. 이런 평화의 개념이 오직 신적 삼위일체에서 나온 이론인 까닭에 분단의 현장에 한국교회가 주도하는 세력으로 서야만 한다.

전 그리스도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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