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렇다. 어느 사람은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면, 병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 보고 싶은 사람을 자주 찾아가 이야기도 나누고, 같은 처지에 대해 비관도 하고 희망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면서, 보고 싶은 사람을 자주 찾는다.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닌다.

찰스 램은 “나는 위대한 인물에게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평범하되, 정서가 아주 섬세한 사람을 좋아한다. 동정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고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수줍음을 잘 타고 겁이 많은 사람, 그리고 순진하고 아련한 애수를 지닌, 그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평범하지만 섬세한 정서를 지닌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을 보면 행복하다. 그 어떤 풍경보다 사람이 좋고,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사람이 좋을 때가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때처럼 행복할 때가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좋아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모시는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가난하지만, 비록 지금은 누구인가의 도움을 받아야 생활하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많은 인연들에 대해 생각한다. 수많은 시대 중 하필이면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그 수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이 나라에서 태어나, 수많은 사람 중에 그 사람과 만나고,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어가는 일 등등.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보람도 갖는다. 그래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했다.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고, 상대를 받아드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70이 넘어간 나는 지나가는 시간들이 참으로 아쉬움으로 남는다.

시인 피천득은 자신의 수필 <송년>에서 “나는 반세기 헛되이 보내었다./그것도 호탕하게 낭비하지도 못하고,/하루하루를, 일주일 일주일을, 한 해 한 해를/젖은 짚단을 태우듯 살았다./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보람 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불의와 부정에 항거하여 보지도 못했고,/그렇다고 학구에 충실하지도 못했다./가끔 한숨을 쉬면서 뒷골목을 걸으오며 늙었다.”고 지난날을 이렇게 적었다.

이 한 토막의 수필은 오늘 나의 생각과 느끼는 정서인 것 같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건강에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이제 하늘나라에 간다. 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볼 수 있을 때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친구도, 형제도, 교인도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나면 그 희망조차 없어진다. 어르신들과 생활하면서 나는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찾아가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희망이며,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2019년 새해 아침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 있을 때 그리운 사람들을 한번이라도 찾아보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소망을 가져본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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