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기해년 새해가 시작됐다. 2019년 새해가 시작됐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또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작이다. 이들에게 새해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실종된 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매년 1만여명의 실종자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거나, 변사체로 발견되지 않는 한 영원한 실종자로 남게 된다. 실종자의 부모는 자식을 잃어버린 그 시간에 멈춰 있다.

기해년 황금돼지띠의 새해가 밝았다. 너도나도 새해 덕담을 주고받으며 복 있는 한 해를 기원한다. 하지만 해가 바뀌는 것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실종자 가족들이다. 이들에게 '새해'는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작이다. 나무옹이처럼 가슴속에 세월의 응어리가 하나 더 생긴 탓에 긴 한숨만 내쉴 뿐이다. 우리는 곳곳에 걸려 있는 ‘송혜희를 찾습니다’이란 프랭카드를 자주 본다.

자녀를 둔 엄마로서 안타깝다. 송양의 부모의 애타는 마음을 감지한다. 이 프랭카드를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송양의 실종사건은 ‘천안 박수진양’, ‘청주 이다현양’의 실종사건과 함게 이른바 ‘여고생 3대 실종’으로 불린다. 이들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생사가 불투명하다. 가족들은 “내 딸을 찾아 달라”고 하늘을 향해, 이웃인 우리를 향해 호소한다. 이들의 호소 역시 하늘에 사무친다.

송탄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 살던 송혜희양(18)의 실종사건은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부모는 제발 살아있기만을 간절히 소망하며, 20년째 딸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맨다. 송양은 자매중 막내로 전교 1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송 양의 부모는 1999년 2월13일 겨울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그 날에 멈추져 있다.

<시사저널> 보도를 그대로 소개하면, 송양은 이날 학원 수업이 끝나고 친구를 만나 한참 수다를 떨었다가 밤 10시쯤 학교 앞에서 집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고 한다. 얼마 후 마을 인근인 도일동 하리 입구에서 내린 송양은 집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논밭과 야산뿐인 한적한 농로. 희미한 가로등만 비추고 있어 밤에는 으스스하기만 하다. 집에 들어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딸이 귀가하지 않자 부모는 왠지 불안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다. 밤 11시쯤 부모는 막내딸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혹시 우리 혜희 못 봤니" "오늘 함께 버스를 타지 않았어"라고 물어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버스 타고 집에 갔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다음 날 송양의 부모는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목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부모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아버지 송길용씨는 경찰서에 찾아가 실종신고를 한 뒤 버스 회사로 갔다. 전날 밤 운행했던 운전기사를 수소문해 목격자를 찾았다. 한 운전기사가 실종 당일 송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밤 10시15분쯤 도일동 하리 입구에서 내렸는데, 30대 초반의 남성이 송양을 따라 내렸다. 오리털 파카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면서,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았고, 몸에서 술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얼굴이나 생김새는 기억하지 못했다. 버스기사의 말대로라면 송양이 버스에서 내릴 때 한 남성이 따라 내렸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송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후 송양의 아버지는 20년 동안 생업을 팽개치고 1톤 트럭에 “송혜희를 찾습니다”란 프랭카드를 내 걸고, 딸을 찾어 전국을 누볐다. 이제 송양을 찾는 것이 생활이 됐다. 지금도 틈나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거나 이동하는 곳에는 여지없이 “송혜희를 찾습니다”란 현수막이 내 걸린다. 그는 사랑하는 딸 혜희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 딸을 찾는 것에 대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딸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개신대 상담학 교수, 굿-패밀리 대표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