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진 시대

오늘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에 사랑과 기쁨의 포도주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와 생명의 노래 소리도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포도주가 떨어졌으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사랑과 기쁨의 포도주를 마음의 항아리에 채워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참된 감동이 실종돼, 인간과 인간 사이에 단절돼 진정한 감동이나, 감격을 받을 수 없다.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함께, 기뻐하지를 못한다. 울지를 못한다. 그러면서 축구경기나 연속극에 쉽게 흥분한다. 우리는 분명 이웃 간의 인정이 메말라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같은 민족 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긴장을 고조시킬 줄은 알아도 평화를 노래하며, 북한동포를 사랑할 줄을 모른다. 북한 동포와 기쁨도 함께 나눌 줄을 모른다. 오히려 교회는 관념에 사로잡혀 북한을 무조건 적대시하며 로마팍스를 노래한다.

그리고 남북한 민족 간의 갈등을 부추긴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하자고 한다. 이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농민들이 빚에 허덕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젊은 노동자들이 격무에 시달리다가 생명을 잃어도, 어린 학생들이 왕따를 당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해도, 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당해도, 함께 아파할 줄을 모르며,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 대해 기업도, 사회도, 정치인들도, 교회도 모두가 벌레를 보듯이 했다. 집이 헐리고 쫓겨나는 철거민들을 우리는 외면해 버렸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이런 곳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나누고 나누다가 생명까지도 나누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탈해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지를 못하고 있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 악이 승리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이웃이 울어도 같이 울 줄 모르고, 피리를 불어도 함께 춤을 출줄 모른다. 이들을 외면한 결과, 이들은 죽임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가해자이다. 한마디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이 죄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어야만, 하나님 나라운동에 참여 할 수 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 태양의 열을 받아 이글거리는 아스팔트처럼 메말라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있다.

 
조건 없는 사랑, 계산하지 않는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
말씀과 지식을 실천적인 힘으로 변화의 기적을 일으켜야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가슴이 돌로 변해 버렸다. 우리에게는 이제 이웃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신을 가두고, 이웃의 아픔과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하나님은 좁은 공간에 갇혀,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고, 악마에게 시험받았을 때, 악마의 첫 번째 유혹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셨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40일 동안 금식한다고 자랑한다. 이들의 마음은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맘몬과 바벨을 좋아한다. 인간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은 폭행과 남의 것을 절도해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해야 할 일을 안 해서 죄인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고, 용서 할 줄을 몰라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어찌 되었건, 윤리와 도덕이 어찌되었건, 먼저 먹고 보자는 주장이 바로 악마의 모습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은 40일 동안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의 아픔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를 않는다, 혼자 먹고 잘살려고 한다. 혼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참교회이며, 참교인인 농촌교회와 농민들의 아픔에 함께 할 줄을 모르는 것은 물론, 함께 사랑하며 기뻐 할 줄을 모른다. 민주주의를 탄압하며, 독재자들을 위해서 충성했던 자들이 이제 와서 민주주의의 선구자인 것처럼 호도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모두가 자기 안에 갇혀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소망하지를 못한다. 세상과 타협하며, 온갖 혜택을 누린다.

장로교단의 교단장과 연합단체의 단체장을 지낸 목사는 40일 동안 금식을 일곱 번을 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영혼, 영적, 사랑, 평화 등 좋은 단어들을 사용하며, 온갖 혼자 거룩한 척 한다. 그러나 그를 아는 주변사람들은 그에게서 예수님의 참사랑과 평화, 그리고 이웃의 기쁨에 전혀 참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그는 또 범죄자들의 소굴인 종로5가를 활보하며, 연합기관을 혼란에 빠트리는데 중심에 있다.

그렇다 우리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심장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래서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에 영혼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강퍅해졌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기도원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며,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40일 동안 금식을 자랑하며, 외식한다. 이들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속에 영혼의 포도주가 가득하다면, 우리의 삶은 생명력이 넘칠 것이다. 이 사회에 정신적인 포도주가 흘러넘치면 모든 사람의 삶이 훈훈하다. 교회에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교인들은 이웃을 사랑할 줄 알고,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와 지역사회와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고, 전도의 자원은 무한히 계발될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도둑질해서가 아니다. 폭력을 행사해서도 아니다. 폭력도, 절도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죄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랑이 메말라 버렸다. 인간 모두는 사랑이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지중해를 건너는 이웃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사랑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도 일어난다. 하나님의 평화가 깨지고 있다. 생명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도 만나고, 인간도 만난다. 요한1서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인간도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사랑도 유지될 수 있고, 평화도 유지될 수 있다. 인간의 참모습대로 살려면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사랑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지창조이후 지금까지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잊고 살았다. 믿음, 소망, 사랑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성서는 이렇게 교육하고 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보라. 연합단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라. 분열과 갈등의 늪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한국교회는 분명 사랑이 실종되었다. 수 십 년동안 함께 같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 왔던 교인간의 다툼은 나를 개방해 너를 사랑할 줄 모르고, 상대방을 받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한번 갈등이 시작되면 100여건에 달하는 소송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헌금이 소송비용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 어느 교회는 통장만 410개라고 한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이다. 교회 안에서 평화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랑이 없어서 여성교인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르고, 세습도 일어나고,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간에 다툼도 일어난다. 교회의 재산을 탈취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걱정한다. 종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일치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과 세상 사람들을 향해 목회자들은 비난하기에 바쁘다. 이러한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을 해보지도 못하고,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혼은 죽은 사람이다. 우리는 고아를 불쌍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고아가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행하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신년 새해 만나는 사람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새해인사를 한다. 그 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이미 많은 복을 받았다. 텔레비전의 모든 연속극은 매일같이 사랑타령을 한다. 유행가의 가사도 빠짐없이 사랑을 주제로 노래하는데,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랑을 상실한 사회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음을 열어 상대를 받아드릴 수 있는 아량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 나라는 혼자 갈 수 없다. 너와 내가 함께 가야한다. 서로 사랑하며 가야 한다. 남한 민족만 가는 곳도 아니다. 북한민족과 함께 회해하고 평화를 이루며 가야 한다. 아니 230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을 넘어 세계 민족이 함께 가야하는 곳이다. 오늘 전쟁과 기아로 인해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하나님나라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때문에 예수님은 처음 태어날 때, 평화를 노래했고,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떠돌이, 창녀, 세리, 고아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 않았는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

조건적인 사랑이나 계산적인 사랑은 인간의 영혼을 구해주지를 못한다. 이런 사랑은 웅덩이에 고인 물과 다르지 않다. 타산적인 사랑은 인간의 영혼을 더욱 갈증 나게 한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목마른 사람의 생명을 구해 줄 수 없다. 맑은 물이어야 인간을 목마름에서 구해 줄 수 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그렇다 사랑을 주고받아야만 다툼도 없고, 평화를 유지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해외선교에 나서면서, 사랑의 빵과 복음(기쁜소식)을 함께 가지고 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선교초기부터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에 대해 매우 인색했다. 그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동 없는 영혼구원과 개인구원, 전도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고난당하는 민족과 유리된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에 바빴다. 가진 자들의 복음이었다. 하나님보다도 맘몬을 더 섬겼다.
한국선교 130년이 지난 오늘 한국개신교회는 하나님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켰다. 그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세계 모든 사람이 찬양하는 자본주의 보편문명이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계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빼앗기 위해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침략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기독교의 세계화에 의해 균열이 생겼고 생기고 있다.

기독교의 세계화는 예수님의 “세계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목음 28:19-20)고 한 선교명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늘 기독교의 세계화는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콜럼버스가 품었던 신대륙을 향한 꿈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유럽의 자본주의의 욕구에서 출발했다.

콜럼버스는 5세기 대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라고 한 기도문을 굳게 믿고 항해의 길에 올랐다. 유럽인들의 기독교적 세계선교의 꿈과 자본주의적 세계지배의 의지가 콜럼버스의 항해에서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와 기독교 선교의 결합으로 그대로 나타났다. 500년이 지난 오늘 세계는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 아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시장, 맘몬이라는 보편적인 문명이다.

이후 세계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계산하지 않는 사랑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인류의 평화는 깨지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에 바뻤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런 사랑, 로마팍스가 아니다. 조건 없는 사랑, 계산하지 않는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을 역사의 현장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생활하며,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그 사랑은 달고 오묘하다.

죄악 속에서 재산을 탕진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들이 돌아오기를 동구 밖에 나와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어머니의 아래로 향한 조건 없는 사랑,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밭길, 벼랑 끝을 헤매는 목자의 사랑, 잃어버리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양을 더 귀하게 여기는 계산하지 않는 사랑,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내준 그리스도의 사랑, 이런 사랑을 자본주의 보편문명에 길들여진 오늘의 시대에 찾아볼 수 없다.

조건 없는 사랑만이 평화를 담보

이런 사랑만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다. 남의 가슴에 감동을 일으킬 수 있다. 조건적인 사랑과 계산적인 사랑은, 감동을 줄 수 없다. 이런 사랑이 있는 한 인류의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다툼과 분열만 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십자군전쟁이 이후 양차대전, 세계의 대부분 전쟁은 기독교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사랑과 평화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의 가슴에서 너의 가슴으로 너의 가슴에서 그의 가슴으로 번질 때 가치가 있고, 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인간들은 짐승들도 하지 않는 짓을 저지른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살해한다. 토막살인을 저질러 깊은 물속에 은폐시킨다. 목사가 교인을 폭행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아들이 목숨을 끊었는데도 10일 지나도 모르는 시대, 아버지 목사가 딸을 살해하고도 그 시신을 은폐시키는 시대, 부모에 의해서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시대, 자살이 늘어나는 시대,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죽어도 한 달이 넘게 모르시는 시대, 노인들이 고독해지는 시대, 목사가 부인을 살해해 마당에 암매장하는 시대, 목사가 양을 영적이란 이름 아래 성폭행하는 시대, 이는 분명 사랑의 포도주, 영혼의 포도주가 떨어진 시대이다.

내 안에 있는 욕심, 증오, 게으름, 교만을 비워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와 사회의 폭력, 부조리, 로마평화 등 모든 악한귀신들을 몰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맹숭맹숭한 물은 기쁨을 주고 향기를 내지 못한다. 우리 속에 있는 말씀과 지식을 실천적인 힘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으킨 포도주의 기적은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주었다. 포도주는 너와 나를 하나 되게 만들어 주었다. 이기적인 벽을 허물고, 위선의 가면을 벗겨 주었다. 그렇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복을 주신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고난 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의 잃어버린 복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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