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사람이 절망에서 일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심약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은 두 갈래로 작용한다. 상대를 지나치게 크게 보는 것과,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것이다. 상대는 헤라클레스로 보이는데 자신은 메뚜기로 보인다.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이 그랬다. 심약한 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거기에는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더라.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4)고 했다. 이들의 보고에 충격을 받은 백성들은 우리는 이제 다 죽게 되었다며 밤새도록 아우성치며 통곡하기도 했다. 반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달랐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8-9)고 했다.

바빌론 포로생활 가운데 있던 백성들에게도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다.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바빌론이나 페르시아나 다 같이 헤라클레스와 같은 존재였다. 그에 비해 자신들은 하루살이 메뚜기와 다를 바 없이 여겨졌다. 그런 이들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헤라클래스에게 영혼을 바치는 것이다. 강자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사는 길임은 약자들의 정신세계에 새겨진 공식이다. 중화사상에 젖은 조선의 지배세력의 정신구조도, 일제식민지 시대 친일파의 정신구조도 다 같이 자기비하를 고착시켰다.

오늘날 한국의 지배집단에게는 미국이 헤라클레스이다. 이걸 신앙적으로 내면화시킨 게 보수적인 한국교회이다. 그들에게 미국은 아예 수호천사이다. 강자에게 아첨하는 법조인, 정치인, 관료, 지식인, 종교인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대다수의 심리구조도 비슷하다. 재벌 2∼3세들이 벌이는 ‘갑질’의 심리구조는 어떨까? 알고 보면 피장파장일 것이다. 그들의 허세와 오만함은 그 속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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