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 식민통치 한국인에게 행운 인식

선교초기 한국에 들어온 일부 영미선교사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알렌의 형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고난당하는 한민족의 아픔에 함께 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선교사들이 3.1만세운동에 협력적이었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이들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민족, 특히 기독교인들을 불순한 세력, 폭도로 매도했다는데서 알 수 있다.

그것은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보는 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인을 ‘불순분자’들의 소행으로 보고했다. 또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불평분자’로 매도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인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인식했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은 “일본의 한국 통치가 세계를 위해서 최고의 유익이며, 한국인에게는 행운이 되는 시기이다”고 일본 식민통치를 정당화 해주었다.

에비슨도 “조선인은 일본지배 아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언명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고 말하는 모펫 역시 “일본인이 한국에 가져온 물질적 지원이 있었다”고 말한다. 감리교의 노블은 일본 총독부 권력자들과 협력을 적극 주장했다. 그것 이외에는 한국인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웰치 감독은 “3.1만세운동 등 민족운동에 가담한 한국인 대다수는 기독교인 아니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스미스를 비롯한 일부 선교사들은 “일본이 ‘박애적’ 식민주의를 행한다”고 본 일본 변호론자였다. 스미스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인을 “‘불평분자’들에 의한 반정부운동이다”고 매도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덜 씩씩하고, 더 야심차며, 덜 립적이다”고 폄하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무지하고, 비위생적이며, 돼지처럼 더럽고, 거짓말을 잘하는 민족이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미국 선교사들의 의식을 미루어 볼 때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한국교회의 평가는 잘못이다. 메켄지는 선교사들의 이런 조작에 대해 “한국인들, 더욱이 여자와 아이들의 맨주먹으로 항거에 일본 헌병과 경찰의 만행, 여기에다 선교사들의 ‘매스꺼운 위선까지 첨가하다니’”하고 개탄했다. 즉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은 친일노선과 원칙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선교사 헤밀톤은 “선교사들은 미국 문명을 가르치고 나서, 기독교가 바로 서양문명의 기본이라는 것을 성급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양품시장을 열었고, 서양 상품선전에 열을 올렸다. 시장에 서양 상품을 공급했다. 또 과수원도 경영했다. 하숙과 여관을 경영하기도 했다. 미국수출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 시장개척을 알선해 줌으로서 이득을 챙겼다. 여기에 자비량선교라는 것이 철저하게 적용됐다.

언더우드는 석유, 석탄, 농기 등을 수입했다. 알렌의 선교직원이었던 그레함 리와 모펫 등은 압록강변 채벌권을 얻어내 약 3천 그루를 벌목했다. 그레함 리는 한국정부가 세금을 부과하자, 이것이 불법이라며 생떼를 쓰기도 했다. 1884년에 들어온 알렌의 상업행위는 그 어느 선교사들보다도 두드러졌다. 알렌은 황실을 등에 업고, 최초의 전차노선, 최초의 도시발전소, 상수도, 전화시설, 현대식 관청건물 등의 산업권을 얻어 미국의 사업가들에게 중개했다. 그는 “한국내의 중요한 모든 재정사업이 우리들의 것”이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 말속에는 피압박민족, 가난한 민족의 설움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의 상업행위는 여기에서 멈추지를 않고, 아시아에서 가장 풍부한 운산지역의 금광 채굴권을 얻어냈다. 후일 이것은 미국의 독점권이 되었다. 여기에서 알렌은 큰 이득을 챙겼으며, 금광을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일본에 팔아 넘겼다. 알렌이 미국국무부차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인들을 인디언과 같이, 흑인들보다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적었다.

31운동 주체인 기독학생·여성·기독농민·백정·기생·걸인 등을 몰각

스미스 등 일부 선교사들은 “일본이 ‘박애적’ 식민주의를 행한다”고 일본 변호
대부분 선교사 ‘정교분리정책’ 내세워 자국 이익 위해 일본 식민세력과 결탁도

3.1운동, 민족의식 자각한 민족운동

한국은 알렌의 말대로 제국주의자들의 활동무대였다. 알렌의 이러한 형태는 일반 서양 사람들의 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한국 식민지화의 결정적인 시기였다. 일본의 승리는 서양 제국주의, 식민주의와의 결탁의 결과라는데 이의가 없다. 특히 미국과 결탁된 배경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지배는 미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으며, 을사보호조약과 함께 미국은 한국과의 수교를 단절해 버렸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미 공관을 철수했다.

분명한 것은 선교사들의 잘못된 형태와 굴절된 역사에 대해 한국교회가 짚고 넘어가야 함은 물론, 다시는 이와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도,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한국교회는 자각해야 한다. 오늘 한국개신교는 서양의 거대문화와 자본주의 문화, 그리고 다윗문화에 매몰된 나머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3.1운동의 주체였던 기독학생, 기독여성, 기독농민, 백정, 기생, 걸인 등을 몰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3.1만세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영미선교사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민족 속에 작게나마 싹튼 민족의식이 폭발한 것이다. 친미적인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당시 국제적 상황에 밝은 몽양 여운형 선생은 김규식 선생 등을 파리강화조약에 비밀리 파견, 조선의 독립을 3월1일을 기해 국내외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이광수를 일본에 보내 2.8독립선언을 이끌어 냈다. 한국교회는 이들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2.8독립선언문은 33인을 자각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3.1만세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국내의 지식을 믿지 않았다. 학생들은 3.1만세운동을 33인과는 별도로 4월 1일 서울역 거사를 준비했다.

이 거사에 참여한 학생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교회의 조직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기독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숭의학교의 송죽회가 그 대표적인 조직이며, 이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다.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에 대한 일본의 만행은 잊을 레야 잊을 수가 없다. 3.1만세운동 일어난 1년 동안 한국교회의 피해는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이후 일본의 한국침략과 지배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선교사들은 앞장서서 ‘정교분리’를 내세워 교인들이 독립운동과 평화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했다.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했다. 이는 많은 기독교 지식인들이 1920년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1920년은 조선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남산에 일본 신궁이 세워졌고, 또 하나는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다.

한국교회는 ‘정교분리’가 선교사들에 의해서 먼저 주창되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영미선교사들이 국제적 불의에 대한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비난받기에 충분하다. 결국 영미선교사들은 일본의 불의에 협력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토의 식민정책과 맞아 떨어져 일본의 한국침략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고 말한다.

정교분리 정책으로 민족의식 말살

장로교공의회 선교사들은 교회와 국가의 상호불간섭이라는 취지문을 전국교회에 배포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과 의식화의 길을 봉쇄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대신 선교사들은 추상적이고, 감상적이며, 영적인 구원과 복음화운동에 모든 공을 들였다. 또한 정교분리정책에 입각해 국민들의 영적 구원과 도덕적인 계몽, 그리고 가난하고 미개한 백성들을 향한 구령사업 등의 선교사업을 펼쳤다.

한마디로 정교분리정책은 복음의 영적진리 아래 일본의 식민지독점권을 허용하고, 한국개신교의 치명적인 반민족적 요인이 되게 했다. 그리고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한민족에게 있어 몰각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하고,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또는 변호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이탈하게 했다.

감리교의 존즈와 스크랜톤은 정치적인 사건을 떠나 도덕적 및 영적인 고양에 힘쓰겠다는 것을 행동지침으로 삼았다. 일본을 제2고향으로 삼은 헤리스 감독을 비롯한 게일, 아펜젤러, 스미드, 브로크멘 등도 일본 식민지지배세력에 적극 협력하며, 조선의 백성을 우매한 민족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원산과 평양 등지에서 심령대부흥운동을 벌였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가 민족의 아픔을 몰각하고,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터부시 하며, 영혼구원에만 매진하게 했다.

선교사들의 이 같은 반민족적인 선교활동은 오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는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한 채, 영혼 구원이라는 이름 아래 강단에서는 자본주의 산물인 돈!돈!돈! 만을 외치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켰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과거의 굴절된 역사에 대해서 반성하기는커녕, 선교사들이 펼쳤던 원산대부흥운동과 평양에서 일어난 회개운동만을 재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영원구원을 외치며, 교회성장에 급급해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덕질 하는 예레미아 시대의 거짓선지자의 역할에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기독교는 정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애급의 파라오 밑에서 압제 당하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갈망했다. 예수님 역시 로마의 통치 아래서 신음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야 할 길이다.

선교사들이 주창한 정교분리는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 정치적인 불의 앞에 굴복은 물론, 권력과 결탁해서 온갖 혜택을 누렸다. 또한 이것은 오늘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기독교정당들이 국회에 입성하지 못한 이유는, 한마디로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교인들을 교육한 결과이다. 또한 해방이후 기독교가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침묵하며, 여기에 참여하는 국민들을 향해 ‘빨갱이’, ‘용공’, ‘좌경’으로 매도하며, 국민적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조선 백성의 주체성 박탈에 일조

정교분리는 선교사들이 철저하게 이용했다. 선교사들의 정신적 문화와 교육사업, 구령사업으로 조선백성의 자유와 평등사상을 심어주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로교 선교사들의 순수복음 제창은 일본 식민지세력의 불의를 은폐시키는 구실이 되었다는 사실. 일본 식민지세력은 회유책으로 한국기독교의 선교사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1910년 한국 선교사들을 일본으로 초청했고,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진출의 문을 열어주었다.

한국기독교는 식민지세력과 한민족의 갈등을 정교분리정책으로 무마시키고,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선교사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고난당하는 한민족의 아픔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주의 죄악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국가들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허사였다.

헐버트 선교사는 “백성들과 관련된 것들이 정치적이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본토로 건너가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죄악을 알리려고 했다. 그는 악의에 찬 외세에 의해서 고난당하는 한민족과 정당한 평가를 제대로 받아보지를 못한 국가를 변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다 한국교회의 일부 목사와 가난한 교인들은 조선의 독립과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행동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독립운동은 가난한 기독여성과 가난한 기독농민, 기독학생들에 의해서 자각되었다. 또한 당시 최고의 조직을 가진 교회는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이 몰려왔다. 기독교의 민족운동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을 자각한 이들에 의해서 계속 진행되었다. 이것은 또한 한국개신교의 가난한 교인들이 민족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을 대변해 준다.

그것은 3.1만세운동에서 그대로 엿 볼 수 있다. 1년 동안 계속된 3.1만세운동은 분명 기독교운동이었다는데 이의가 없다. 그러나 운동의 주체는 33인이 아니다. 길쌈해서 남편과 자식들에게 옷을 입혔던 무명옷고름 입에 물고, 검은 치마를 휘날린 민족의 어머니이며, 생명의 담지자인 ‘기독여성’과 밭을 갈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기독농민’, 민족의 미래 지도자인 ‘기독학생’이 주체세력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들을 중심해서 민족운동과 비폭력 평화운동을 재조명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오늘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의 회귀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향한 경고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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