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유대교와 기독교는 십계명을 핵심 교리로 공유하지만 분류 방식에 미세한 차이가 난다. 유대교는 기독교에서 흔히 도입 구절로 취급하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희의 하나님 야웨라’(출 20:2; 신 5:6)를 제1계명으로 삼는다. 유대교의 제1계명에 대한 견해는 한 동안 십계명의 도입구로 보는 입장과 첫 계명으로 간주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중세 유대교의 이븐 에즈라는 이 구절은 명령형이 아닌 평서문인데 어떻게 계명이 될 수 있겠는가 반문한다. 하지만 그는 “계명”은 아니어도 모든 계명의 원천이며 권위의 근원이라고 인정한다. 이에 반해 라시는 ‘나는… 너의 하나님 야웨라’를 제1계명의 명백히 주장한 바 있다.

초기 기독교 학자들은 ‘나는 … 너의 하나님 야웨라’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를 결합하여 하나의 계명으로 이해한 경우가 있다. 물론 최근 연구자들 중에도 앞에 언급한 두 구절을 첫 계명으로 받아들이는 예가 없지 않다. 중세 교회개혁 이후 신구교를 막론하고 이 구절을 오직(!) 십계명의 역사적인 도입으로 여긴다. 여기에 근동의 힛타이트 조약문의 발견이 한 몫을 했다. 즉 역사적인 서문에 주권자의 소개라는 유사한 형태가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근동의 조약에 나오는 것처럼 십계명의 주권자를 소개하며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는 구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의 서문은 고대 조약에 비해 간단명료하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십계명의 이 구절이 후대에 첨가된 구절로 인정하는 추세다. 해릴슨에 의하면 본래 십계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으나 그 본문을 예배에서 낭독하면서 편입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렇다면 유대교가 이 전문을 제1계명으로 삼는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연구는 자칫 십계명의 본래적인 의미를 놓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유대교의 제1계명이 어떤 의미인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구약성서의 모든 계명을 긍정계명과 부정계명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긍정계명 245항의 첫 명령을 ‘나는 … 너의 하나님 야웨라’고 소개한다.

이 계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즉, 존재하는 모든 배후에는 그 창조자이신 절대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 사상이 곧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낸 너의 하나님 야웨’에 표명되어 있다. 따라서 마이모니데스에 의하면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의 존재를 가능케 한 절대자(first cause)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야말로 으뜸가는 계명이 된다.

위 본문이 유대교의 제1계명이건 기독교의 역사적인 서언이건 상관없이 십계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차대하다. 즉 ‘나는 … 너의 하나님 야웨라’는 신앙의 길을 인도하는 향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 너의 하나님 야웨라. 그러므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야웨라. 그러므로 너는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 일컫지 말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야웨라.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야웨라.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야웨라.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 … …//

필로는 위 본문의 중요성을 “무신론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강조한다. 즉 ‘야웨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주의 한다면 결과적으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게 되며, 안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등의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 야웨’가 십계명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어 각 계명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강조한 것이다(출 20:5,7,10,12/ 신 5:11,14,15,16). ‘나는 너의 하나님 야웨’는 권유적 명령이 아니라 ‘신앙고백적인 계명’으로 모든 계명의 대전제이며 출발점이다.

한신대 구약학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