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일본 식민지 아래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며, 항일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여성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잊고 살아왔다. 이들은 생명의 담지자로서 고난당하는 민족의 어머니였다. 이들 중 안동 부잣집 막내딸이자 대갓집 며느리인 여인 김락에게 주목한다. 김락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실명했다. 이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고난을 당하다가 1929년 2월 순국했다.

김락 여사의 항일운동은 80년 동안 묻혀 있었다. 2000년 안동대학교 김희곤 교수가 김락 여사의 일화가 쓰인 <고등경찰요>를 발견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2001년 김락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늘 살아서 숨 쉬는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잊혀져 가는 독립운동가, 하마터면 영원히 잊을 뻔 했던 고난당한 민족의 어머니들의 발자취를 찾아내 재조명은 물론, 후세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기록을 남겨 놓아야 한다.

김락 여사는 안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김진란은 경상도 도사를 지냈다. 당시 김락 여사의 집안은 ‘사람 천 석, 글 천 석, 밥 천 석’ 합쳐서 삼천 석 댁이라고 불렸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김락 여사는 18세에 이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 대갓집 맏며느이자 안 주인이 된 것이다. 남편 이중엽은 ‘파리장서 사건’의 주모자였다. 당시 시국은 그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시아버지 이만도는 의병장이었다. 김락 집안의 모든 남자는 자연스럽게 시아버지를 따라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김락 여사는 시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두 아들과 시동생, 시누이를 돌봐야만 했다. 맏며느리로서 집안을 이끌며, 식솔들을 돌봤다. 묵묵히 그들의 의병활동을 도왔다. 친정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큰 오빠 김대락은 항일투쟁을 위해 동생과 조카들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갔다. 큰언니의 가족들도 이를 따라 나섰다.

김락의 형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이다. 이상룡과 큰 오빠는 서간도에서 경학사를 조직,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항일무장투쟁의 전초기지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편 이중엽은 1914년 안동과 봉화 장터에서 유림들과 궐기를 촉구하는 ‘당교각서’를 돌리고,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파리장서’라고 불리는 독립청원서를 발의하였다. 또한 강원도와 경북지방의 유림대표 서명을 받는 일도 맡았다.

파리장서 사건으로 남편은 투옥되었다. 이듬해 11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동흠은 대한광복회 박상진을 집에 숨겨준 인연으로 대한광복회에 가담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둘째아들 중흠은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다. 맏아들 용환은 ‘조선 최대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많은 종가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희사했다. 둘째 사위 류동저 역시 안동청년회에 참여해 거금 100원을 의연금으로 기부하며, 활동했다.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정통적으로 내려오는 선친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이를 묵묵히 지원해 주는 민족의 어머니로서 고난의 길을 자처한 김락 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정한 민족의 어머니였으며, 독립운동가였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으며,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간절히 염원하는 민족의 어머니였다. 그녀 역시 행동하는 독립운동가였다.

경북 안동에서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7일 예안면에서 시작되었다. 2차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나이 57세로 예안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체포됐다. 그녀는 일경의 고문으로 두 눈을 잃었다. 그녀는 두 눈이 멀어 주검으로 돌아온 남편의 시신을 확인조차 못했다.

그녀는 대갓집 맏며느리로 평생을 독립운동을 하는 가족들과 항일의병, 그리고 독립군들의 뒷바라지를 한 고난당하는 민족의 어머니였다. 마지막에 본인마저 3.1만세운동에 참여, 두눈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민족의 고난을 위해 십자가를 진 민족의 어머니였다. -국가보훈처 자료 참조-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