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1) 파문을 당한 루터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전체 진행과정은 각 지역이나 국가마다 혼란과 혼돈 속에서 교리가 다른 여러 그룹들 사이에서 새로 등장한 개신교 교회를 놓고서 엄청난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공통으로 받아들인 핵심교리는 모두 다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는 재발견과 확신에서 나왔다. 특히 어거스틴이 강조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믿음을 통해서 칭의가 주어진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으니, 죄의 노예상태에 있는 인간의 부패에 대해서 비관적이었고, 오직 은혜의 시발점은 하나님에게만 소망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루터는 교회 갱신의 진행과정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 완벽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95개 조항을 발표한 이후로 루터는 지속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공격을 당했다. 루터는 테젤의 과도한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철저히 회의적이었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적인 확신만큼은 분명하였다(롬 1:17).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자신의 이신칭의 교리와 구원론을 거듭 성경에 근거하여 옹호하면서,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학”을 제창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보기에는 가장 어리석은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서 나타났다. 그래서 루터가 가장 자주 인용하고 즐겨 생각하던 것이 바로 시편 2편 4절,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세상의 군왕들을 비웃으시리라”는 말씀이었다.

루터는 고난과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가장 탁월한 논문들과 복음의 진수를 밝히는 기념비적인 저술을 발표하였다. 루터는 엄청난 압박 속에서 로마 교회 권세자들과 날카롭게 충돌하면서, 맹렬하게 자신의 주장들을 『독일귀족에게 드리는 편지』, 『교회의 바벨론 유수』, 『기독교인의 자유』 등 명문을 발표하였다. 두려움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450편의 논문, 3,000개의 설교, 2,580개의 편지 등, 모두 100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루터는 둘째 아이 엘리자베트가 낳은 지 몇 달 만에 죽었고, 셋째 막달리나는 1542년 13살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 일로 너무나도 상심한 루터도 쇠약해지고 말았다.1536년부터는 건강이 나빠졌고, 한쪽 귀에 염증이 발생해서 큰 고통을 당했다.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신부직을 파면한다는 교서를 발표하고(Exsurge Domine),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당대 최고 권력으로부터 정죄당한 자라는 낙인을 갖고 살았던 루터의 생애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2) 츠빙글리의 순교

16세기 유럽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안 속에 처해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그 누구도 극심한 살해의 위협에서 안전할 수 없었다. 초기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극한적인 대립의 연속이었다. 1522년 겨울, 쮜리히에서 일단의 성도들이 모여서 로마가톨릭에서 제정한 금식주간의 음식규칙을 어기고 집주인이 제공하는 쏘시지를 먹었다. 그 모임에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소지지를 먹지 않았던 츠빙글리는 바로 그 다음 달, “음식의 선택과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식기간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면, 또한 특정한 음식을 피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먹든지 자유하다”고 담대히 츠빙글리는 선포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정당한 의무를 준수할 것이지만, 우상숭배처럼 만들어진 엉터리 교리는 거부한다는 것이 바로 스위스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마침내 1523년 11월, 쮜리히 시의회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지켜야할 의무는 없다고 결의하였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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