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동 규 목사

국가보훈처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인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우리의 영원한 민족의 누나 유관순 열사를 선정했다. 3.1절하면 33인보다도 아우내 장터서 만세운동을 일으킨 한민족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 열사를 기억한다. 또 그녀의 올케 조화벽 지사의 뜻도 함께 기린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보훈처가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를 선정한 것은 당연하다.

정부는 유 열사의 3.1만세운동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 열사는 1902년 충남 목천에서 5남매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입학했고 3·1운동이 있기 하루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 모인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관순 열사는 시위 결사대 동지 5명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최대 시위인 ‘남대문역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알렸다. 그리고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했다. 유 열사는 3월13일 사촌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했다. 4월1일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시위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용기를 북돋웠다. 시위대는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병천 주재소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둘렀다.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 했다. 유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다.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달려든 어머니도 일본 헌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유 열사는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저녁 유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됐다.

유 열사는 천안 헌병대와 서대문 감옥 등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옥중에서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지하 감방에 감금돼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28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3·1운동을 주도한 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로 개성과 강원도 양양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조화벽 지사가 있다. 조 지사는 유관순 열사의 오빠 류우석의 부인이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 두 사람은 한 시대에 각기 다른 공간에서 일제에 맞섰다. 1895년도 태어난 조 지사는 1919년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 학생이었다. 유학계가 주류였던 양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양양감리교회 전도사였던 부친 조영순 등의 영향으로 멀리 떨어진 개성의 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개성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한 호수돈여학교 비밀결사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총독부의 휴교령이 내려진 뒤에는 고향인 양양으로 가서 시위 확산을 주도했다. 독립선언서를 숨긴 버선을 가방에 넣어 몰래 운반한 뒤 교회 청년이자 양양보통학교 8회 졸업생 김필선에게 전달했다. 그 뒤 김필선은 동창생들을 모아 면사무소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를 복사했다. 유학계이며 30살 전후 중장년층을 규합하던 양양보통학교 1회 졸업생 최인식과도 연락이 닿아 함께 준비했다. 학생들의 활약에 힘입어 양양에서도 4월4일부터 매일같이 만세시위와 행진이 벌어졌다.

유관순의 오빠 류우석과 결혼한 뒤엔 양양에서 부친과 함께 ‘정명학원’을 설립해 가난으로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헌신했다. 유관순 열사와 조화벽 지사는 우리들의 영원한 민족의 누나이다.

예장 개혁선교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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