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이회영 선생의 가문은 10대에 거친 사대부가였다. 이회영 선생의 가족인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시영, 이호영 등 모두는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위해 희사했다. 이들 6형제는 “사대부 명문가로 일본의 노예가 되어 호의호식 할 바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모든 재산을 내놓았다.

이 형제들은 을사오적 암살, 신민회, 헤이그 특사파견, 고종황제 망명 계획, 신흥무관학교 설립, 의열단 등 국내외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팔았다. 이 형제들이 보여준 나라사랑은 호의호식하며, 살수도 있는 길을 마다하고, 사회의 지도층, 민족의 지도층으로서 민족의 아픔을 어깨에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힘겹게 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이 고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으며, 민족과 함께하는 길이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이회영 선생의 형제들은 지도층이 보여주어야 할 일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이회영 선생의 형제 6명은 경술국치에 분노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전 재산을 팔아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족 50여명이 함께 만주로 넘어갔다. 만주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회영 선생 가족들이 독립운동에 내 놓은 돈은 현재의 가치로 6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명망 높은 집안으로 재산도 방대했다. 그렇다 보니 일본식민지세력은 돈과 귀족지위를 내세워 회유할 수 밖에 없었다. 6형제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전 재산을 팔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두 내놓았다. 힘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돈으로 이회영 선생 6형제는 먼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항일무장투쟁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을 길렀다.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지청천 장군, 이범석 장군 등 3천명의 정예군을 길러냈다. 첫째 형 이건영 선생(중국서 병사), 둘째 형 이석형 선생(중국 빈민가를 떠돌다가 죽음), 셋째 형 이철영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을 보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회영 선생은 뤼순감옥서 순국했다. 동생 여섯째 이호영 선생은1933년 가족과 함께 행방불명됐다. 가족 50명 중 20명만 조국의 광복, 민족의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이회영 선생의 일가족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이들의 마지막은 매우 쓸쓸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일흔 가까운 나이까지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회영 선생은 아버지의 쓸쓸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이석영 선생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에게 밀고를 당해 순국했다.

이회영 선생의 가족들이 택한 길은 한마디로 힘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족 모두가 보여준 행동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의무를 다했다. 이들의 고난의 길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며,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회영 선생은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였으며 신채호, 이을규 등과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