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3.1만세운동은 지식인들의 운동이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3.1만세운동은 눌린자 기생, 백정, 떠돌이, 학생, 농민, 여성들이 참여한 기층민중들의 대한독립운동이며, 민족행방운동이다. 그리고 비폭력평화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기생 김형화 열사는 기생 30명여과 소복을 입고, 경찰서 앞에 기습적으로 나타나 일경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의 외침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분명 3.1만세운동은 수 백년동안 억압을 받으며 살아온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여성해방운동인 동시에, 민족해방운동이다.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향화 열사는 1896년 7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순이이다. 김향화 열사는 기명으로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명성에 걸 맞는 이름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느 때부터인지는 몰라도 수원에 내려와 기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향화 열사는 수원 기생이 된 후 '수원예기조합'의 꽃이 되었다.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나, 목청은 탁 트여서 애절하면서도 구슬프게 노래를 잘했다. 순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다고 전한다.

검무와 승무에 능했고, 경성잡가와 서관소리를 잘 불렀다고도 한다. 그녀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스물셋의 나이에 기생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수원기생 30여 명을 이끌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2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았고, 징역 6개월에 처해져 옥고를 치렀다. 재판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청했다. 모두 그녀의 입에 주목했다. 그의 의로움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1919년 3월 29일 수원기생조합 기생들은 자혜의원으로 검진을 받으러가던 중 일제의 보건 정책에 항거하여 수원경찰서 앞에서 김향화 열사를 선두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자혜의원 앞으로 이동하여 다시 한 번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자혜의원에서 이들에 대한 검진을 거부하자 기생들은 의원을 나와 다시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녀는 경찰에 붙잡혀 온갖 고문을 당했다.

김향화 열사는 기생으로서가 아닌 조선의 백성으로 재판정에 당당히 서서 대한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김향화 열사의 의로움은 세상에 알려졌으며, 우리정부는 2009년 4월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김향화 열사와 수원 기생들의 3․1운동은 관기의 후예와 전통예능의 전수자로서 보여준 민족적 항쟁이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기생제도와 식민통치의 피압박민족으로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당시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며 보여주었던 수원 기생들의 민족적 의로움은 오늘날 국민들에게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다.

분명 김향화 열사는 눌린자의 여성이다. 3.1만세운동 당시 대한민국의 소리는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해방을 간절히 염원하는 피압박 민족, 가난한 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 흰색옷고름 입에 물고 검은 치마 희날리던 보잘 것 없는 기생, 길삼해서 가족들에게 옷을 입혔던 이 땅의 어머니, 밭을 갈고 나무해서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했던 이 땅의 농민들의 소리였다.

특히 눌린 자 여성의 구원에로의 외침은 피압박민족의 구원을 함께 외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구원은 한민족 모두가 갈망하며,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운동으로 표출됐다. 눌린 자 여성의 상황은 원시때부터 오랜 역사에서 창출됐다. 눌린자 여성의 해방운동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 와서 여성운동은 놀라운 사회의식을 환기시켰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의 피억압민족의 상황도 이러한 맥락에서 초래되었다.

김향화 열사의 민족해방을 갈망한 만세운동을 이같은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눌린자 여성, 3.1만세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유관순, 김마리아, 김락, 조화벽, 김향화, 남자현 등등의 민족해방운동과 비폭력 평화운동은 여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문제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분명 민족의 어머니이며, 역사의 어머니이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