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100년 전(199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해, 4월 4일, 솜리(익산)에서 문용기(문정관) 선생은 남녀시민 만여 명을 모이게 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선생은 익산시 오산면 관음마을 출신으로, 계몽교육에 관심을 가졌으며, 군산 영명학교(현 군산 제일 중고)에서 학생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고, 비밀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남전교회(남전교회=오산교회)의 장로이기도 하였던 문용기 선생(남정리교회가 경영하는 도남소학교 교사였다고도 전해짐)은 최대진 목사와 교회 성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참고: 국가보훈처)

교회 남전도회 성도들과 학생 등 200여명의 교인들이 솜리(익산) 장터에 나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데 이때 만세운동의 규모나 피해 면에서도 남한 최대가 될 정도였다고 하며,
그 때 왜국(일본)헌병, 보병 등 300여명은 총칼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의 해산을 위협했다.

헌병들은 독립열정에 불타 연설하며 태극기를 휘두르는 문용기(문정관)의 오른팔을 검으로 후려치니 태극기를 든 채 오른팔이 잘리어 떨어졌다.

그는 즉시 떨어진 태극기를 왼팔로 들고 휘두르며 만세를 선창했다. 헌병이 그 왼팔마저 검으로 후려치니 태극기를 든 왼 팔도 잘려 나갔다.

그러나 문용기(문정관)는 성큼 앉아 태극기를 입으로 주워 물고 힘차게 만세를 선창했다.

이 때 헌병이 검으로 배를 찌르니 피가 쏟아져 강을 이루었고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어떤 사람을 뒤에서 넌지시 도와줌)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산 국민이 되게 하겠소!” 마침내 ‘문용기’선생은 숨을 거두었다. 41세의 나이였다. 이날 만세 시위에서 ‘문용기’ 선생 외에도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등이 사망했고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출처 : 새전북신문(http://www.sjbnews.com)

이분들의 피 흘림이 있었기에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순국자(순교자)들의 공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제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던 이들, 그 후손들이 도리어 호의호식하며 배를 채우고 있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하니?

비단 그것은 일반 사회적인 문제만은 아니며, 교회 내에도 왜구의 앞잡이로 신사에 참배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독립을 외쳤던 목사님들을 면직, 파직 하며 왜구들에게 팔아넘기는 등을 자행했던 자들의 후예들이 참회하지 않고 애국자들로 변신하여 활개를 치는 나라?

그동안 우리는 6.25의 참화를 거쳐 비탄에 빠지다 보니, 인간의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그저 잘 먹고 잘 사데 모든 것을 내어준 격이 됨으로 신앙의 혼잡이 이루어진 세대에 잠식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관(순교관)이란 무엇일까?

따라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외침에 비하여, 일제의 침략 야욕 등 대한 경계의식에는 일언반구 한마디도 없이, 일본 해군이 우리 바다에 진입을 환영하자는 태극기를 흔든다면 그 태극기는 무슨 의미일까?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의 총 칼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희생의 피를 흘리며 태극기를 흔들었던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태극기는 언제 흔들어야 할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고 아니 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眞實)로 진실(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人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生命)이 없느니라(요 6:53)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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