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2) 츠빙글리의 순교

16세기 유럽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안 속에 처해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그 누구도 극심한 살해의 위협에서 안전할 수 없었다. 초기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극한적인 대립의 연속이었다. 1522년 겨울, 쮜리히에서 일단의 성도들이 모여서 로마가톨릭에서 제정한 금식주간의 음식규칙을 어기고 집주인이 제공하는 쏘시지를 먹었다. 그 모임에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소지지를 먹지 않았던 츠빙글리는 바로 그 다음 달, “음식의 선택과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식기간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면, 또한 특정한 음식을 피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먹든지 자유하다”고 담대히 츠빙글리는 선포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정당한 의무를 준수할 것이지만, 우상숭배처럼 만들어진 엉터리 교리는 거부한다는 것이 바로 스위스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마침내 1523년 11월, 쮜리히 시의회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지켜야할 의무는 없다고 결의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언제든지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금식 규정의 일환으로 치즈와 버터에 관한 취득금지 결정은 로마 교회의 속임수일 뿐이다고 결의하였다.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처와 볼프캉 까피토는 쮜리히의 결정에 동참하여 1530년에 동일한 조항을 채택하였다. 참된 교회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시지 않은 규칙들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는 인식에 공감하였다. 결국 츠빙글리는 약 10여년의 투쟁을 전개하다가, 스위스 내륙의 가톨릭 주들에게 경제봉쇄로 압박을 가했다. 1531년 로마가톨릭 진영과의 전쟁에서 일반 병사의 복장으로 싸우다가 카펠 시토 수도원 근처의 산비탈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츠빙글리는 갑옷을 입은 채 참살되었다.

바젤의 종교개혁자 외코람파디우스도 역시 몇 주 후에 츠빙글리의 패전 소식을 듣고 사망하였고, 미코니우스가 계승하였다. 쮜리히에서는 불링거가 뒤를 이어서 종교개혁의 바톤을 이어받았다.

3) 대학살에 쓰러진 무명용사들

종교개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군주들은 정치적 자율성에의 요구와 연계되었음을 감지하고 강압적으로 박해를 가했다. 1550년대와 1560년대에 개혁파 개신교는 눈부시게 확장되었고, 상대적으로 로마가톨릭은 침체되어갔고, 점차 종교개혁의 정당성이 확립되어졌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칼, 이탈리아 종교재판소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고문, 죽임 등의 희생을 당하였고, 감옥에 던져지고, 고향과 재산을 다 잃고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던가는 정확하게 파악할 길이 없다.

우리가 개혁신앙의 후예들이라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야할 종교개혁의 무명용사들이 엄청나게 많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1572년 8월 24일 주일, 성 바돌로매의 날에 프랑스 왕 챨스 9세와 캐써린 왕비가 승인한 왕실 군대가 가프파르 드 꼴리니 장군을 살해하고, 가장 야만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3일 동안에만 저명한 개신교 귀족들과 위그노들이 5천명이나 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왕 헨리 3세와 4세도 가톨릭 열광주의자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프랑스 개신교회에서는 살아남을 방법은 전쟁이었고, 1570년부터 20여년 동안 전투가 계속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1536년과 1549년에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잔인한 보복이 가해졌다. 1535년에는 독일 뮌스터에서 재세례파가 멸절을 당했다. 노르웨이, 스웨덴, 네델란드, 폴란드,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보헤미안 개신교들이 가장 무서운 박해를 받았다. 이런 치열한 대립과 혼란들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이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보내신 것이라고 격려하였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