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중 곤 목사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항일무장투쟁 하면 대부분 남성들의 전유물로 생각해 왔고, 생각하고 있다. 남성들 못지않게 항일무장투쟁 중심에서 여성들의 활약도 매우 컸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영화 <암살>의 주인공인 남자현 선생을 새롭게 만나 본다. 남자현 선생은 1872년 12월 7일 안동에서 유학자 남정한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1남 2녀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남정한은 통정대부(정 3품)당상관이라는 벼슬을 했다. 남자현의 나이 19살떄 아버지의 문하생이었던 김영주에게 출가했다. 출가한지 6년만인 1896년에 남편 김영주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때 남자현의 뱃속에 아들이 있었다. 이 때 부터 남자현은 배를 짜서 시장에 내다 팔면서, 시부모를 봉양했다. 시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성으로 동네에서 효행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현의 마음속에는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구국의 마음과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무토를 암살하려다 실패했을 때 남편의 피 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데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 였다. 그녀는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장투쟁이 불가피 하다고 생각했다. 그해 3월 9일에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의 호랑이 김동삼 선생의 서로군정서에 입단한다.

그녀는 독립운동가들이 싸울 때 싸우지 말라고 말렸다. 당시 독립운동가 사이에 갈등이 심각했다. 남자현은 화해의 중재자로 나선 것이다. 1948년 잡지 "조광"은 독립운동가들의 분쟁을 그대로 적고 있다.

"조선민족의 결점은 당파와 분쟁이라. 이로써 나라가 망하였거늘 조국광복을 운동하는 그대들이 외지에 가서도 당파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서북파니, 기호파니, 안(안창호)파니, 이(이승만)파니, 1922년 3월 부터 8월 까지 남만 화이현 등지에서는 동족간의 피 흘리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미대씨가 특파되어 화해공작에 애썼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선생(남자현)은 이 일을 크게 근심하여 산중에 들어가서 3주간 금식기도를 하고, 손가락을 배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 관계자를 소집했다. 그 성의와 순국정신에 감격한 독립운동 간부들은 누구나 뜨거운 눈물과 죽음을 각오하는 피의 서류에 각각 잘못을 회개하고 완전한 쌍방 간의 화합이 성립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주민들은 그 은공을 감사하여 곳곳마다 나무로 비를 세워 그 공덕을 표창해주고 만주 각층 사회에서는 누구나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녀는 만주일대를 돌아다니며 "동지간의 알력과 다툼이 잠시나마 독립운동에 차질이 생긴다면, 이역만리까지 온 망명의 뜻이 없어지고 마는것 아닙니까"라며 눈물로 화합을 호소했다. 이 화합을 위해 손가락 2개를 잘랐다. 첫번째 단(斷)지는 1920년이었고 두번째 단지는 1922년이었다. 남자현이 동지들의 단합을 호소하며 두번째 단지를 하려고 할 때, 이미 하나의 손가락을 동지들의 화합을 위해 바친 것을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극구 만류를 했다. 하지만 단지를 강행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말리지 마시게 내 이 손가락을 아끼지 말고 우리 동포를 아끼고 이 나라의 내일이나 아끼시오"

그녀는 1920년 청산리, 봉오동 등지에서 독립군이 싸울 때 여성들을 모아 전선을 지원했다. 또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이에 감동한 독립군들이 남자현에게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예장 합동총신 총회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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