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축복에 관한 성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본문의 하나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지금까지 ‘제사장 나라’는 ① 하나님께 봉헌된 나라, ② 이방의 중보자로서 이스라엘, ③ 제사장이 다스리는 왕국, ④ 제사장 같은 왕 등으로 해석되었다. 이 가운데 중보자로서 의미가 강력하게 지지를 받아왔다. 그것은 이방에 대한 중보자가 신약성서의 내용, ‘왕 같은 제사장’과 잘 연결된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벧전 2:9; 계 5:10).

초기 번역성서 역시 이 구문의 정확한 의미를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70인역>은 ‘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hood), <불가타>는 ‘사제적 통치’(regnum sacerdotale), <페쉬타>는 요한계시록의 언급과 같이 ‘나라와 제사장’(계 1:6; 5:10) 등으로 미세한 차이가 있다. <70인역>이 본문의 내용에 비교적 근접한 것으로 보이나 해석의 여지는 남는다. 그렇다면 모세가 말한 ‘제사장 나라’는 가능한 것일까?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만 주어진 직위였다. 사제 계급의 외면적 특징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다. 그러나 본문은 사제의 본원적인 임무와 역할 이전의 단계를 암시한다. ‘제사장 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는 곧 사제들이 신탁을 받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읽고 기록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기초한다.

고대 사회에서 글은 인간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다. 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우주의 비밀을 알리는 도구, 곧 신적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다(출 32:16; 신 9:10; 민 5:23; 사 29:11; 단 5:25).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라고 칭한 이유가 있다. 곧 ‘신의(hieros) 문자(glyphs),’ 또는 ‘신비로운 그림’이란 뜻에서 알 수 있듯 상형문자에는 비밀스런 그림과 글자 등이 포함된다. 문자를 쓰고 읽는 ‘문해력’을 갖춘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복잡한 상형문자의 습득과 더불어 기록을 위한 뛰어난 기억력이 동시에 요구되었기 때문에 특수한 영역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선택받은 몇몇 사제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신탁을 듣고 백성들에게 전하는 중재자로서 이 과정에서 기록은 필연적이었다. 따라서 상형문자는 ‘사제의 문자’였다.

흥미롭게도 성직자를 뜻하는 영어 clergy는 ‘서기, 사무원’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종교 문화적 현상이 내포된 개념이다. 당시 성직자들은 읽고 쓰는 일과 교육에 거의 독점적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려면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히브리어는 상형문자가 아니라 22개의 글자로 이뤄진 알파벳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약을 잘 이해하고 준행하려면 문맹이 아니라 ‘글을 읽고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제사장 나라는 문해력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고대 사회에서 글은 특정 계급의 소수에게만 독점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제사장 나라’는 모든 사람이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공동체를 가리킨다(삿 8:14를 보라). 이제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문해력”(universal literacy)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바다 가운데 살아간다. 누구나 글을 읽고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최근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보급은 문해력의 비약적인 확산을 가져왔다. 여기저기 ‘말씀’이 넘쳐나며 사설(邪說) 또한 어지럽게 날린다. 문해력은 갖추고 있으되 역설적으로 말씀과 사설의 혼미한 경계 가운데서 정도(正道)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제사장 나라’는 홍수처럼 넘실거리는 지식과 정보를 바르게 읽고 파악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요한다. 곧 창조 세계의 질서와 하나님의 우주 섭리를 알아차리고 식별하게 하는 제사장의 역할이 필요한 때다.

제사장 나라는 개혁자들의 ‘만인사제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후자가 누구든지 사제의 중재 없이 하나님을 직접 예배할 수 있다는 신학 개념이라면, 전자는 사제의 문해력을 내세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를 중시 여기는 구약적인 개념이다. 제사장 나라의 전제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결과는 ‘거룩한 백성’이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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