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못 이야기다. 병이 치료되는 효험이 있는 못이니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으나,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라야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이다. 그 많은 병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도 그렇고, 물이 움직이자마자 서로 먼저 뛰어들고자 사투하는 장면은 아비귀환이 따로 없어 보인다. 그러니 38년 된 병자의 하소연은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도무지 경쟁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그래도 기회를 얻을까 해서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가당치도 않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요 5:7) 삶의 극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서로 먼저 살겠다고 아비귀환으로 다투는 현실을 담아낸 대답이다. 기회는 제한되어 있고, 절박한 사람은 많은 현실에서 강자와 약자의 처지는 이곳에서도 다를 바 없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을 세상 밖으로 내몬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38년 된 병자는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섰을지도 모른다.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의 처신은 어떤가? 그는 자기 병을 고쳐 준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유대인들에게 달려가서 그가 누구인지를 고해바치고 있다. 비루한 사람이다.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았음에도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이러하다. 그는 은혜 아래 있기보다 죄 아래 복종하는 편이 더 편안한 사람이다. 이 비루하고 못난 인간은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죄 사함 받아 영혼이 구원받는 데는 관심이 없고, 단지 일상의 급한 도움에만 매달린다면 말이다.

구원은 한 인간의 생활 조건이 달라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에 들어갈”(히 10:19)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의 삶은 죄인이었을 때의 삶과는 달라야 한다. 연약한 자를 밀쳐내고 억압하는 사람이나 그런 나라는 심판을 면할 수 없다(사 47:6-7).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질고를 치료받는 것보다 영혼이 건강한 삶을 지향해야 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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